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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잊을 수 없는 고향 ‘촌년’ 시절

등록 2005-12-18 17:28수정 2005-12-19 14:00

글쓰기 교실
안새롬/전남대사대부고 2학년

“촌년아! 야, 촌년!”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광주광역시 북구 양산동 사는 한 여자아이는 항상 날 ‘촌년’이라 불렀다. 숫기 없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변두리 연제동서 살고 있는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야, 귀가 먹었냐? 얼굴 넙덕한 촌년 주제에 왜 내 말 먹어?”

하굣길, 연제동서 같이 사는 친구와 함께 가고 있노라면 그 아이는 내 뒤로 졸졸 따라붙으며 나를 괴롭혀댔다. ‘오늘은 꼭 이사 가자고 할 거야….’ 그 아이가 사라지면 나는 펑펑 울면서 오늘은 꼭 아빠에게 이사 가자고 말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부모님과 할머니 모두 피곤할 정도로 먼 곳으로 일을 다니고 계셨다. ‘그래, 이사 갈 수 있었다면 진작 갔을 거다. 직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돈. 우리 집엔 그게 없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촌년으로 살아야 한다’며 혼자 끙끙 앓았다. 나이보다 정신적으로 더 성숙했던 나는 도저히 이사 얘기를 부모님께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아빠랑, 엄마랑, 그리고 할머니까지 슬프게 만들 순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다. 양산동 사는 아이가 놀려대도 참자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뿐이니까. 그렇게 1여년을 더 버티었다. 눈도 꿈쩍 않고 들은 체 만 체했더니 제 풀에 지쳤는지 아니면 그새 철이 들었던지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더 이상 ‘촌년’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꿋꿋이 버티길 잘했다. 왜냐면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은 어린 나에겐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정말로 최고의 추억들만 안겨다 주었으니까. 시골이 얼마나 좋은데! 그 때 도시에 살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많은 것들이 거기엔 다 있었다. 자연 안엔 다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우리 가족도 그에 어울렸다. 봄에는 엄마와 쑥 캐러, 여름에는 동생과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답시고 들판에 파묻혀 살았고, 결국 찾아서 화단에 옮겨 심었다. 가을에는 깨 터는 할머니 옆에서 파리똥을 따 먹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겨울에 아빠와 함께 밤새 정강이까지 푹푹 묻힐 정도로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는 재미란! 말로는 다 이를 수 없다.

3학년 때, 드디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으로 가득찬 이 곳을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1년 전만 해도 떠나지 못해 무거운 눈물을 애써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지내던 이 곳.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 곳에 대한 모든 인식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 살던 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그 주홍색 지붕…. 죽을 때까지 그 지붕을 보고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구나 싶었다. 앙상한 가로수들도 쓸쓸히 나를 배웅해 주는 것 같았다.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고, 결국엔 울음을 떠트리고 말았다.

뒷이야기지만 그 때 울었던 건 헛수고였다. 도시로 가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건만 도착한 곳은 담양이었다. 하하하! 담양에서도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었지만 연제동 촌년 시절 만큼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곳은 마치 내 일부처럼 풍경 하나 하나를 모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각인되어 있다. 더 빨리 사랑해주지 못해 늘 미안한 곳,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존재하는 소중한 곳,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곳. 연·제·동· 외·촌·마·을!

평 : 힘겨운 어린 시절의 추억, 유쾌하게 풀어쓴 글맛 좋음

이 글에서는 친구에게 무시당하며 힘겨웠던 학교생활을 당차게 이겨내는 모습과, 도시 변두리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추억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글맛에 따뜻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박안수/광주국어교사모임 회장, 전남대사대부고 교사 ansu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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