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촬영기와 영사기로 제작한 짧은 영화 10여편을 유료 상영했다. 이들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제시했고, 영화가 철학하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기차처럼 ‘현실’이 달려와 사유를 자극하다.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
연기 뿜는 열차 역에 닿을 때
첫 관객들 깜짝 놀라 몸 돌려… ‘실감나는 세계’ 철학 대상으로 오랫동안 고전하면 주로 인문·사회 분야 서적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과학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더구나 ‘영화 고전’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는 우리에게 ‘철학하기’를 요구하는 고전들을 축적하고 있다. 종이 책과 영상문화가 문명사적으로 대립적이고 단절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점은 좀 더 명확해진다. 그 깨달음의 열쇠는 ‘시각화’이다. 인류 문명사는 ‘시각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수 만 년 전의 동굴 벽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이동시킨 문자문화의 탄생은 인류 문명의 대변혁을 가져온 시각화 또는 영상화(Visualization)의 전형이다. 이런 점에서 ‘말을 영상화한 문자’와 오늘날 전형적인 영상문화(Visual Culture)의 범주로 다루는 사진, 영화, 만화 및 디지털 이미지들 사이의 단절적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영상문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시각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구술문화를 회복시키고 다양한 ‘청음(聽音)문화’를 도입했다. 영화에서 음향은 대사, 음악, 음향효과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의 종합예술적 성격은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합성으로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현실들’을 제시하는 일이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영화는 실감나는 ‘현실적 효과’를 위한 기예(技藝)적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생일이 있다. 1895년 12월 28일이 그것이다. 에디슨이 영사기를 발명했지만, 다수의 관객 앞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이용한 최초의 영화 상영은 그 날 있었기 때문이다. 성탄절과 연말 사이 휴가 분위기의 토요일 오후 뤼미에르 형제(Auguste et Louis Lumiere)는 <기차의 도착>을 비롯한 10편의 짧은 영화를 입장료를 낸 관객 앞에서 상영했다. 그들은 각각 몇 십 초밖에 안 되는 필름으로 새로운 현실들을 제시한 것이다.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등장해 역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정말 그 기관차가 자기들 쪽으로 달려오는 줄 알고 몸을 돌릴 정도였다. 이런 극사실주의적 영상 외에 <물 뿌리는 정원사> 같이 연출을 시도한 것도 있었다. 공원 잔디에 호스로 물을 뿌리던 남자가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자 호스 안을 들여다보는데 느닷없이 물이 뿜어 나와 흠뻑 젖게 된다. 순간 한 소년이 뒤에서 호스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쫓아가 붙잡아온다. 간단하지만 희극적 줄거리가 있는 연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든 우리 삶의 현실을 최대한 ‘실감나게’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영화는 환상기법을 사용해도 현실감을 도출하는 유도 능력이 있다. 현실과 맞먹을 만큼의 인공 경험을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지난 백 여 년 동안 수많은 현실들을 제시해왔다. 영화의 본질적 성격이 ‘현실의 제시’라면, 철학의 본질은 ‘현실의 탐구’이다. 철학하기는 현실을 보고 생각하는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탐구하기도 하고, 고대로부터 서구사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플라톤 철학이 제시한 ‘이데아의 현실’도 탐구한다(플라톤에게는 그것이 진짜 현실이다). 영화도 정말 실감나는 현실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플라톤이 ‘개념’의 힘으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를 발견했다면, 오늘날 영화는 실감나는 ‘효과’의 힘으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를 발명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는 하나의 현실적 세계이다. 영화가 매우 진지하게 현실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은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뤼미에르의 초단편 필름들은 영화의 탄생 때부터 심도 있는 철학적 사유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원시사회의 동굴 벽화로부터 문자의 발명을 거쳐 최첨단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영상문화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며, 그 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철학하기의 대상이 되도록 초석을 놓은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첫 관객들 깜짝 놀라 몸 돌려… ‘실감나는 세계’ 철학 대상으로 오랫동안 고전하면 주로 인문·사회 분야 서적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과학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더구나 ‘영화 고전’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는 우리에게 ‘철학하기’를 요구하는 고전들을 축적하고 있다. 종이 책과 영상문화가 문명사적으로 대립적이고 단절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점은 좀 더 명확해진다. 그 깨달음의 열쇠는 ‘시각화’이다. 인류 문명사는 ‘시각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수 만 년 전의 동굴 벽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이동시킨 문자문화의 탄생은 인류 문명의 대변혁을 가져온 시각화 또는 영상화(Visualization)의 전형이다. 이런 점에서 ‘말을 영상화한 문자’와 오늘날 전형적인 영상문화(Visual Culture)의 범주로 다루는 사진, 영화, 만화 및 디지털 이미지들 사이의 단절적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영상문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시각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구술문화를 회복시키고 다양한 ‘청음(聽音)문화’를 도입했다. 영화에서 음향은 대사, 음악, 음향효과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의 종합예술적 성격은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합성으로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현실들’을 제시하는 일이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영화는 실감나는 ‘현실적 효과’를 위한 기예(技藝)적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생일이 있다. 1895년 12월 28일이 그것이다. 에디슨이 영사기를 발명했지만, 다수의 관객 앞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이용한 최초의 영화 상영은 그 날 있었기 때문이다. 성탄절과 연말 사이 휴가 분위기의 토요일 오후 뤼미에르 형제(Auguste et Louis Lumiere)는 <기차의 도착>을 비롯한 10편의 짧은 영화를 입장료를 낸 관객 앞에서 상영했다. 그들은 각각 몇 십 초밖에 안 되는 필름으로 새로운 현실들을 제시한 것이다.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등장해 역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정말 그 기관차가 자기들 쪽으로 달려오는 줄 알고 몸을 돌릴 정도였다. 이런 극사실주의적 영상 외에 <물 뿌리는 정원사> 같이 연출을 시도한 것도 있었다. 공원 잔디에 호스로 물을 뿌리던 남자가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자 호스 안을 들여다보는데 느닷없이 물이 뿜어 나와 흠뻑 젖게 된다. 순간 한 소년이 뒤에서 호스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쫓아가 붙잡아온다. 간단하지만 희극적 줄거리가 있는 연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든 우리 삶의 현실을 최대한 ‘실감나게’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영화는 환상기법을 사용해도 현실감을 도출하는 유도 능력이 있다. 현실과 맞먹을 만큼의 인공 경험을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지난 백 여 년 동안 수많은 현실들을 제시해왔다. 영화의 본질적 성격이 ‘현실의 제시’라면, 철학의 본질은 ‘현실의 탐구’이다. 철학하기는 현실을 보고 생각하는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탐구하기도 하고, 고대로부터 서구사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플라톤 철학이 제시한 ‘이데아의 현실’도 탐구한다(플라톤에게는 그것이 진짜 현실이다). 영화도 정말 실감나는 현실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플라톤이 ‘개념’의 힘으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를 발견했다면, 오늘날 영화는 실감나는 ‘효과’의 힘으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를 발명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는 하나의 현실적 세계이다. 영화가 매우 진지하게 현실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은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뤼미에르의 초단편 필름들은 영화의 탄생 때부터 심도 있는 철학적 사유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원시사회의 동굴 벽화로부터 문자의 발명을 거쳐 최첨단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영상문화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며, 그 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철학하기의 대상이 되도록 초석을 놓은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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