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리산 깊은 골에 칡이 태어났다. 눈을 떠보니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들이 보였고, 칡은 저도 하늘 쪽으로 머리를 두고 커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칡은 땅으로 뻗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하늘 쪽으로 자라 세상에 남는 무엇이 되고 싶었기에, 칡은 신령님께 간곡히 방법을 물었다. “변화는 만남으로서만이 가능하므로, 진정 좋은 만남을 가져보라”는 대답을 듣게 된 칡은, 그 후 ‘만남’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새벽 잣나무 위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고, 칡은 곧고 크게 자라는 그 잣나무와 벗하기로 결심한다.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참고 바위 위로 기어가, 칡은 마침내 가장 높은 데 있는 잣나무를 붙든다. 그렇게 긴긴 세월이 흘렀다. 몇 사람이 안아야 할 굵기로 자란 잣나무와 칡나무는 함께 베어져, 잣나무는 섬진강의 배가 되고 칡나무는 화엄사의 한 기둥이 되었다.
정채봉의 동화 <만남>의 내용이다. 누구든 천성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의지와 노력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며, 좋은 만남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누구의 삶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정채봉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진 나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십 대 후반, 나는 저 칡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덜컥 결혼은 하였으나 내가 누군지 몰랐기에 ‘누군가의 누구’(아내, 엄마, 며느리…)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날마다 스스로에게 고통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아무래도 문학밖에 없었는데, 마침 정채봉 선생님이 동화 창작 사숙을 여셨고 인연이 닿아 첫 제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서까래감도 멀었지만, 글을 쓰며 한 겹 한 겹 마음의 껍질을 벗으며 ‘나다움’을 찾아온 시간이었음은 안다. 글과 사람이 나뉠 수 없음을 일러주고, 어린이를 하느님으로 알며, 아동문학을 문학의 으뜸으로 알던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만큼인들 내가 있으랴.
새해를 맞으며 또 다른 좋은 만남을 조심스레 꿈꾸고 소망한다. 잣나무가 없이 칡나무가 어찌 절 기둥이 될 수 있었겠는가만, 칡나무가 없이 잣나무인들 어찌 섬진강의 배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좋은 만남이라면, 칡나무가 되어도 좋고 잣나무가 되어도 좋으리라.
선안나/동화 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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