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는 범죄가 일어난 시점이 아니라 범죄 피해가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이른바 ‘체육계 미투(나도 고발한다) 1호’로 알려진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씨가 가해자인 코치 ㄱ씨(41)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김씨에게 1억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소송은 통상 10년의 불법행위 소멸시효보다 한참 더 지난 20년전 성폭력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초등학생 때인 2001~2002년에 코치 ㄱ씨에게 성폭력 피해를 보았지만, 보복 등을 우려해 신고하지 못했다. 이후 김씨가 2016년 한 테니스 대회에서 ㄱ씨를 우연히 만난 뒤 초등학생 시절 충격이 떠올라 두통, 수면장애, 불안, 분노 등의 증세에 시달렸다. 김씨는 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고, 2018년 6월 증거를 모아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무변론으로 진행돼 김씨가 승소했다. 이에 ㄱ씨는 피해 시점인 2002년 8월을 기준으로 10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받은 2016년 6월에 불법행위로 인한 김씨의 손해가 현실화됐다고 봐야 한다”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손해배상 청구의 장기소멸시효 기산일(첫날)을 손해가 현실로 나타나거나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도 “성범죄 발생일을 손해가 현실화한 시점으로 보면, 당시에는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거나,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는 소멸시효가 완성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옥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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