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한국형 구축함 강감찬함(4400톤). 해군 제공
“배가, 사람이 날 망친다고 솔직히 보고드렸는데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 하기 싫으면 말해라. 그럼 이제 널 도와줄 수 없다’ 이러시고 저희 침실 분들 모아놓고 ‘XX이가 아프니까 잘 보듬어줘라’ 이랬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이제 잘하는 게 힘듭니다. 너무 지쳐서 실망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선임 병사의 폭행과 폭언,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다 지난 6월 극단적 선택을 한 해군 강감찬함 정아무개 일병이 숨지기 약 석 달 전인 지난 3월30일 병영생활상담관에게 보낸 메시지다. 그는 앞서 함장에게 세 차례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함장은 적절한 조처를 하는 대신 견디라고 권했다. 군인권센터는 9일 이러한 내용의 정 일병의 휴대폰 포렌식 결과를 공개하며 강감찬함 지휘부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군인권센터는 기자회견을 열고 “강감찬함 함장과 부장이 정 일병의 생명권을 침해하고 헌법상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했다는 취지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유족과 군인권센터는 정 일병이 지난 3월 선임병의 폭언과 폭행을 함장에게 신고했지만 가해자들과 분리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군 당국의 수사도 정 일병이 극단적 선택을 한 6월18일 이후에서야 시작됐다.
센터는 정 일병의 휴대전화 포렌식을 통해 확보한 함장과 병영생활상담관 등과의 메시지를 공개하며 정 일병이 지휘관들의 방치에 가까운 대응으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공개한 메시지를 보면 정 일병은 지난 3월16일 함장에게 피해 사실을 처음 알리며 자해 충동과 극단적 선택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선임병의 전출 조치를 원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함장은 이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까 생각하니 함장으로서 가슴이 아프다”며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고 함장이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답을 보냈다. 센터는 “다음 날 함장은 피·가해자 분리랍시고 피해자의 보직을 변경하고, 함 내에서 다른 격실로 자리를 옮겨 준 데 그쳤다”며 “정 일병은 계속 가해자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센터는 정 일병이 이후에도 두 차례 지휘부에게 피해를 호소했지만 군 수사기관 신고는 물론, 보호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지난 3월27일 가해자들이 새로운 부서 선임에게 자신에 대한 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 일병은 함장에게 전화해 죽고 싶다고 말했으나 함장과 부장은 정 일병에게 가해자와 대면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어 같은달 28일 주임원사로부터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벌점 부과로 마무리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 일병은 함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구토와 공황발작, 과호흡 증상을 설명하며 정신과 치료와 육상 전출을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이제 널 도와줄 수 없다”는 답이었다.
포렌식 결과 정 일병이 선임으로부터 당한 폭언의 구체적인 내용도 알려졌다. 해군 동기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면, 선임들은 ‘해군에서 일어난 홋줄(정박용 밧줄) 안전 사고’를 빗대 그에게 “홋줄 맞아 뒤X라”, “X X 꺼져라” 등의 욕을 했다. 정 일병은 메시지에서 “정말 갑판이 좋은데, 사람들이 날 너무 싫어해. 죽었으면 좋겠대”라고 적었다.
센터는 “군이 가해자의 편에서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놓고 참극을 빚어내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장관 이하 군 수뇌부가 상황 모면 외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며 인권위 조사를 촉구했다. 해군은 “해당 사건의 엄중함을 인식한 가운데 병사 사망과 관련된 병영 악·폐습 전반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했으며 함장과 부장은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임태훈 소장이 강감찬함 정일병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지휘부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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