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죽음 밝히려 정신병원 입원했죠”
18일 저녁(현지시각) 미 버지니아의 한국식당에 교민 50여명이 모였다. 며칠 전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의 의문사와 관련해 서울고법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최 교수는 유신시절인 1973년, 간첩 혐의를 쓰고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이는 최 교수의 막내동생 종선(59·버지니아 거주)씨. 그는 최 교수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또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가족이다. “이제 매듭 하나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 회한이 없겠습니까. 내가 형님을 남산(중정)으로 모시고 간 사람인데…. 줄곧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는 중앙정보부 감찰실 직원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공채 9기로 중정에 들어가 감찰실에 배치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형인 최 교수가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으로 진술할 게 있다는 얘기를 상부로부터 듣고, 그는 형을 설득해 자진출두시켰다. 형이 간첩으로 조작되리란 건 까맣게 몰랐다. ‘설마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인데 그렇게까지 하겠는가’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중정이 형님을 데려간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기관원들이 강의실까지 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가는 걸 보고 서울대 총장에게 ‘대통령에게 항의하라’고 말한 게 문제가 된 겁니다. 간첩은 누명이었죠.”
그는 최 교수가 숨진 뒤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형의 죽음에 관한 수기를 빼곡이 썼다. 중정 내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조사 도중 자살’이란 공식발표가 거짓이며 ‘고문에 의한 타살’이란 주장을 적은 기록이다. 이 수기는 사망 이듬해인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에게 전해졌고 14년이 흐른 1988년 비로소 세상에 공개됐다. 최 교수의 억울한 죽음을 푸는 단초가 된 그의 수기는 지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보관돼 있다.
그는 1994년 이민 와 버지니아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고 있다. 2001년엔 최 교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산자여 말하라>란 책을 펴냈다.
“형님이 1970년 무렵 하버드대에서 1년6개월간 교환교수를 지낸 뒤 귀국하려 하자 하버드대 교수들이 말렸습니다. 한국이 너무 암울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제자들이 있으니 돌아가겠다며 귀국을 강행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을 좋아했던 분이었죠.” 그는 “법원 판결로 형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됐다고 생각한다. 정말 세상이 많이 좋아진 걸 느낀다”고 덧붙였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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