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우 변호사가 2011년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군사독재 시절 민청학련 사건 등을 변호하며 민주화 운동가와 노동자를 위해 헌신한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 변호사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84.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 변호사는 경기중·경기고·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고등고시 사법과(13회)에 합격했다. 해군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65년 대전지법 공주지원 판사로 임용되면서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판사로서의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70년 서울형사지법으로 인사발령이 난 뒤, 박정희 대통령의 세 번째 임기가 막 시작된 이듬해 7월, 판사들의 집단사표제출 사건인 ‘1차 사법파동’을 주도하면서 법복을 벗었다. 당시 이 법원에는 주요 시국사건이 몰렸는데, 판사들이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리고 영장을 기각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사법파동의 계기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맡은 서울형사지방법원 현직 부장판사 등을 상대로 뇌물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법관들은 이를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로 봤다. 시국사건·공안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오자,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정권이 검찰을 통해 사법부를 탄압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홍성우·최영도 단독판사는 판사들을 모아 사법파동을 주도했다. 이 법원 판사 37명을 비롯한 전국의 판사 153명이 사법권의 독립을 외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자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부 장관을 통해 관련 수사를 중단시켰다. 이 일로 홍 변호사의 법조인 인생 2막도 시작됐다.
그가 처음부터 인권변호사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법대 동기이자 같은 1세대 인권변호사로 꼽히는 고 황인철 변호사가 홍 변호사를 인권변호의 길로 이끌었고, 황 변호사와 함께 맡게 된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아 정부 전복을 꾀하고 있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240명을 체포했다. 홍 변호사는 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철, 유인태 등을 무료 변론했다. 이 과정에서 홍 변호사는 함께 변론에 나선 고 강신옥 변호사와 함께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으로 법정에서 끌려나가는 초유의 사태를 당하기도 했다.
여러 난관에도 그는 인권변론을 멈추지 않았다. 윤보선·김대중 긴급조치 위반 사건(1976), 와이에이치(YH)노동조합 사건(1979), 서울 미문화원 방화 사건(1985),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1986), 박종철 고문치사사건(1987년) 등 주요 시국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다. 홍 변호사는 2011년 시국사건 변론 회고록 ‘인권변론 한 시대’를 출간하면서 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학생운동 출신도 아니고 정치적 성향도 아니었다. 어느 날 황 변호사가 ‘고생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같이 돕자’며 시작한 게 민청학련 사건이다. 그게 내 인생을 바꾸었다. 사건을 할수록 ‘내가 안 하면 누가 이 험한 일을 할까’ 싶은 그런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고 술회했다.
1988년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창립해 대표를 맡았던 홍 변호사는 앞서 1987년 10월 <한겨레> 창간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1995년 장을병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과 개혁신당을 창당하며 정치에 뛰어든 뒤 통합민주당 수석최고위원, 1997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다.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3년엔 고문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진실의 힘 인권상’을 받았다.
홍 변호사의 빈소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다. 조문은 17~18일 이틀동안 할 수 있다. 유족으로는 아내 정경남씨와 아들 홍원기(오비에스 경인티브이 아나운서 팀장)·윤선(동덕여고 교사)·윤주·윤정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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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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