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여간 화재 현장에서 일하다 희귀암으로 숨진 소방관에게 공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지금까지 소방관에게 발병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희소한 암이지만, 여러가지 유해 요인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폭넓게 인정해야한다는 취지다.
28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조국인 판사는 육종암으로 투병 중 숨진 소방공무원 ㄱ씨의 가족이 인사혁신처장을 상대로 ‘육종암이 공무 수행과 관련한 질병임을 인정하라’는 취지로 낸 공무상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등 소송에서 지난 18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1996년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된 ㄱ씨는 근무 23년째인 2019년 희소질병인 육종암 진단을 받아 투병하다 이듬해 숨졌다. 육종암은 뼈, 근육 등 근골격계에 발생하는 암이다. ㄱ씨는 1996~2002년까지 약 8년간 화재현장에서 화재진압 등 업무를 수행했고, 나머지 기간은 대부분 내근직으로 일했다. ㄱ씨 유족들은 인사혁신처에 공무상 요양 및 순직 유족 급여 지급을 신청했지만, 인사혁신처는 “ㄱ씨가 화재진압 업무를 수행하며 유해물질에 노출됐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건 상병은 공무 수행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반발한 ㄱ씨 유족은 소송을 냈다.
재판에서는 ㄱ씨가 앓은 육종암이 화재현장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육종암은 전체 암의 약 1%를 차지하는 희소병인데, ㄱ씨 종양이 발생한 종격동(양쪽 폐 사이) 부위는 전체 육종암 가운데 1%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질병의 원인을 밝히기 어렵고, 현재까지 소방공무원 사이에서 이러한 질병이 발생한 사례도 없다. 인사혁신처 쪽은 재판에서 “공무상 재해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ㄱ씨 질병 사례가 많지 않아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긴 힘들지만, 그렇다고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인이 화재현장에서 일한 시기는 소방관에게 공기호흡기 등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소방관이 면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등 각종 유해 화학물질과 발암물질에 장시간 노출되는 환경이었고 △고인의 업무였던 화재진압·현장지휘·화재원인 조사 등은 상당한 스트레스가 수반되는 데다 주·야간 교대근무를 반복하는 업무였던 점 △고인에게 폐결핵 등 관련 질병이나 흡연 등의 요인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이 사건 상병의 발병 내지 악화와 고인의 업무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삼성전자 엘시디(LCD·액정표시장치) 공장에서 일하던 중 희소병인 다발성 경화증(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만성질환)에 확진된 이아무개씨에게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한 2017년 대법원 판결도 인용했다. 당시 대법원은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1·2심 판결을 뒤집고 “발병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희귀질환이더라도 여러 유해 요인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 등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 인과관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며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 재판부도 “비록 고인과 같은 소방공무원 중 종격동 육종암이 발생한 사례는 없고 화재현장의 유해화학물질이 이 병의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규명되어 있진 않으나, 그런 이유만으로 고인의 업무와 상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소방관의 경우 통계적으로 암 발생 위험이 유의미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분석 결과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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