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파키스탄 출신 유학생 ㄱ씨는 2016년 3월 파키스탄에 잠시 입국했다가 지금의 아내인 ㄴ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ㄴ씨 가족은 ㄱ씨의 신분(카스트)이 다르다는 이유 등으로 결혼에 반대했고, 어머니와 외삼촌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라고 비난하며 ㄴ씨를 폭행했다. 참다못한 두 사람이 함께 도망가자 ㄴ씨 가족은 ㄴ씨를 찾아내 강제로 집으로 끌고 가려 했고, ㄱ씨 가족들을 납치해 폭행·협박하기도 했다. ㄱ씨와 ㄴ씨는 파키스탄 경찰에 도움을 구했지만, ㄴ씨 가족에게서 뇌물을 받은 경찰은 “법정에서 가족들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하면 ㄱ씨를 죽이겠다”고 ㄴ씨를 위협한 일도 있었다. 가족의 협박은 두 사람이 2016년 8월 한국에 유학생과 유학생 배우자 체류 자격으로 입국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19년 3월 난민신청을 했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명예살인 협박을 받은 이들 파키스탄 출신 부부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그동안 법원은 이와 유사한 난민신청 사건에서 “가족 내부 문제다” “본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난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결혼 등으로 명예살인 위기에 놓인 난민 신청자에게도 난민 지위가 인정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행정1-1부(재판장 심준보)는 ㄱ씨와 ㄴ씨 부부가 ‘난민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취지로 낸 난민불인정 결정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지난 19일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이 파키스탄 가족에게서 지속적인 협박과 폭행을 당했고, 파키스탄에서 해마다 수백건의 명예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파키스탄으로 돌아갈 경우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 해당한다. 파키스탄 정부나 수사·사법기관은 이들에게 효과적인 보호를 제공할 의사나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며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앞서 법무부 인천출입국·외국인청과 1심 법원은 ‘가족이 반대하는 연애결혼을 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명예살인을 당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난민법과 난민협약 등에 따르면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한다.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으로서 박해’란 집단 다수와 대립하는 성별이나 이념,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박해받거나 동성애 등으로 박해받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1심 재판부는 이들의 연애결혼이 이런 박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심은 “이들을 위협하는 건 일부 과격한 가족 구성원일 뿐이다. 이는 사인의 범죄행위에 불과하고 파키스탄 사법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들 부부 쪽에서 ‘가부장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파키스탄에서 여성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 것은 명예살인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고, 파키스탄에서 현재도 해마다 1천명 이상의 명예살인 피해자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2심은 ㄱ씨 부부가 박해에 놓여있다고 보고 이들의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난민 신청인이 가족 의사에 반해 사회계급이 다른 상대방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생명, 신체에 대한 위협 등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나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 난민협약에서 말하는 박해에 해당한다”며 1심보다 폭넓게 박해를 해석했다. ㄱ씨 부부가 느끼는 명예살인 위협은 파키스탄의 사회적 상황에 비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파키스탄 정부가 ㄱ씨 부부를 적절히 보호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며 “원고들의 난민 인정 신청을 불허한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김인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와 함께 ㄱ씨 부부를 대리한 김종철 변호사는 “결혼을 둘러싼 사회의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을 당할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로, 명예살인의 배후에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 규범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박해의 범위를 넓게 인정해 성적 자기 결정권 및 결혼의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에 대한 위협도 박해로 본 것이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가족 간 명예살인 사건에 대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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