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 포항/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소설집 <저주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국제부문에 최종 후보로 올랐던 정보라 작가가 시간강사로 일했던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정 작가를 비롯해 강사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강사법’과 그마저도 따르지 않는 대학들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한교조)과 정 작가는 31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강사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 지급 판결을 촉구한다”며 “교육부는 즉각 모든 대학강사에게 퇴직금을 지급토록 강제하면서 예산을 확보하라”고 밝혔다. 이날 서부지법에선 정 작가가 지난 4월 연세대에 퇴직금, 주휴·연차수당, 노동절 급여를 지급하라고 제기한 청구소송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정 작가는 지난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매학기마다 연세대학교에서 러시아어·러시아 문학·러시아문화체험 등의 과목을 가르치며 한 학기에 한 과목당 32.5시간∼49.5시간을 강의했다. 지난 2019년 8월부터 시행된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은 주 5시간 이상 강의를 담당한 강사에게 학교가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는데, 연세대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자 정 작가가 법적 다툼에 나선 것이다.
정 작가는 11년 전체를 퇴직금 산정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세대 쪽은 “강사법은 2019년 8월1일부터 임용된 자에 대해서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법에 따라 퇴직금을 지급할 계획”이라는 입장이다. 정 작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이지만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한다. 절반 이상의 책임을 맡는 사람에게 수당을 주지 않는다는 건 비정규직이니 차별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오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앞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기자회견에 참석해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소송은 정 작가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최근 비슷한 소송이 계속 제기되며 법원은 시간강사에게 주휴수당·연차휴가수당 등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강사 입장에서 실제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없는 실정이다. 박중렬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은 “퇴직금을 받으려면 개별 소송을 해야 하는데, 강사의 공식적인 강의(시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승소해도 적자가 나고 소송비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학이 법의 사각지대를 찾아 퇴직금과 각종 수당을 미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원 판례들은 강사가 학교에서 한주에 5시간을 강의할 경우, 강의준비시간은 2배가 걸린다고 보고(10시간) 한주에 15시간을 일했다고 본다.
하지만 현행법은 주 15시간 미만 노동자에게 퇴직금, 주휴·연차 휴가 수당 지급을 강제하지 않는다. 배태섭 한교조 대외협력국장은 “대학이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고 시간강사들에게 주 5시간 미만으로 강의를 배정해 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교조는 강의시간 외에도 강의준비·시험 출제 및 감독·평가뿐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수행하는 상당수 업무 시간을 포괄해 강사의 노동시간을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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