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치기’에 이용될 거라 생각하고 계좌를 빌려줬는데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 범행에 사용됐다면, 범행의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금융실명법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 위반 방조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청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5일 밝혔다.
ㄱ씨는 2019년 1월 성명불상자로부터 ‘마카오에서 한국에 있는 고객을 상대로 환전해주는 업무를 하고 있다. 고객이 입금한 돈 940만원을 인출해 환전소 직원에게 건네달라’는 제안을 받고 자신의 계좌를 빌려줬다. 이후 ㄱ씨는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돈을 빼서 성명불상자에게 건네줬는데, 알고 보니 이는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송금한 금액이었고 ㄱ씨는 졸지에 보이스피싱 ‘인출책’ 역할을 한 셈이 됐다. ㄱ씨는 금융실명법 3조 3항 ‘그 밖의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것’을 방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2심은 ㄱ씨를 무죄라고 봤다. ㄱ씨 같은 방조범은 정범(범죄행위를 한 자)이 범행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 실행을 용이하게 해줬을 때 성립한다. 그런데 원심은 ㄱ씨의 행위가 금융실명법에서 규정한 ‘그 밖의 탈법행위’인지 불분명하고, ㄱ씨가 인식한 행위(환치기)와 정범이 한 행위(전화금융사기)가 달랐다고 밝히며 “피고인이 정범인 성명불상자가 어떤 탈법행위를 실행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며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ㄱ씨의 행위가 ‘탈법행위’에 해당하고, ㄱ씨가 정범의 범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해도 범죄가 성립한다며 유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은 정범인 성명불상자가 금융실명법상 ‘탈법행위’에 해당하는 무등록 환전영업을 위해 타인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인식하고 이를 돕기 위하여 자신 명의의 금융계좌 정보를 제공했다. 정범인 성명불상자는 이를 이용해 전기통신금융사기 범행을 통한 편취금을 송금받아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 실명의 금융거래를 했다”며 “피고인에게는 금융실명법 위반죄의 방조범이 성립하고, 피고인이 정범인 성명불상자가 목적으로 삼은 탈법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범죄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외환 환전인 줄 알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계좌를 빌려줬다가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하급심 판결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ㄱ씨 사건처럼 탈법행위인지가 불분명하고,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는 줄 몰랐던 사건들에 대해 그동안 하급심에서는 유·무죄 판결이 엇갈려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탈법행위’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피고인이 인식한 정범의 목적이 그와 같은 ‘탈법행위’의 범주에 해당한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범행이 성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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