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가 더는 결혼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11년 전 대법원은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는 성별정정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는데, 일률적으로 성별정정을 막아선 안 된다는 새로운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ㄱ씨가 가족관계등록부 성별을 ‘남’에서 ‘여’로 정정해달라며 낸 등록부 정정 재항고 사건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가정법원으로 돌려보낸다고 24일 판결했다.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ㄱ씨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에 가깝다고 느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체격과 목소리가 변해가는 것에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2012년 아이를 품에 안을 때까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며 살았다. 이후 정신과에서 ‘성주체성장애(성전환증)’ 진단을 받은 ㄱ씨는 아내와 이혼했고, 2018년 11월 외국에서 성전환수술까지 받았다.
국내법상 성전환자가 성별을 법적으로 변경하려면 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상의 성별정정을 신청해야 한다. 1·2심은 모두 ㄱ씨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성별정정을 불허했다.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배우자나 미성년자 자녀의 법적 지위와 사회적 인식에 곤란을 초래한다”며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불허했는데, 이 판결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대법관 12명 중 11명)은 혼인관계에 있지 않고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에 대해 “성전환자의 기본권과 미성년 자녀의 보호 및 복리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법익 균형을 위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실질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기존의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성전환자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바탕으로 인격과 개성을 실현하고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단지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사정만을 이유로 성별정정을 불허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성전환 부모의 성별정정이 이뤄질 경우 가족관계등록부상 관련 내용이 노출돼 미성년 자녀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국가가 관련 제도의 내용·절차를 보완해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이 공개되지 않도록 해 미성년 자녀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조처를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며 “성전환된 부모와 자녀 사이의 다양한 상황을 살펴보지 않은 채 미성년 자녀가 있다고 성별정정을 막는 것이 오히려 실질적인 의미에서 미성년 자녀의 복리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홀로 판례 변경에 반대한 이동원 대법관은 “기존 판례는 사회 일반 통념에 들어맞는 합리적 결정”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사법은 다수결 원칙이 지배하는 입법이나 행정과 달리, 다수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최후 보루 역할을 할 때 존재 의의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 판결”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날 판결은 ‘미성년 자녀를 두고 있지만 혼인상태가 아닌’ 트랜스젠더에만 적용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혼인 중인 성전환자의 경우까지 폭넓게 성별정정을 허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 부분에 관하여는 명시적 합의,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현재 혼인상태에 있는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에 대해서는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국의 성전환자 성별정정은 외국과 비교해 엄격한 편이다. 법원의 성별정정 관련 예규를 보면 △만 20살 이상으로 혼인한 사실이 없으며 자녀가 없을 것 △성전환수술로 성기를 포함한 외관이 바뀌었을 것 △생식능력을 상실했을 것 등을 기준으로 두고 있다. 영국·독일은 외과적 수술이 없어도 성별변경이 가능하며, 아르헨티나는 개인의 신청만으로도 성별정정이 가능하도록 별도의 요건을 두고 있지 않다. ‘미성년 자녀 유무’를 성별정정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다.
ㄱ씨를 대리한 박한희 변호사(희망을 만드는 법)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과거 판결을 바로잡고 성전환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성별정정 시 미성년 자녀의 유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게 청구인의 주장이었다. 성별정정을 허가하면서 예외 사유가 있을 수 있다고 밝힌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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