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동 발언’ 계기 된 영천사건 31일 전체위 심의
경찰기록을 근거로 6명은 진실규명 불능처리 예상
경찰기록을 근거로 6명은 진실규명 불능처리 예상
지난 10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집회에 참석했던 김만덕 영천유족회장이 호소문을 읽고 있다. 고경태 기자
17일 오후 진실화해위 조사국 관계자가 대회의실에서 진행되는 제64차 전체위원회 모습을 티브이로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10·1 사건과 영천
10월사건은 당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계속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선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6년 9월 하순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에 이어 10월 1~2일 사이 대구에서 주민 봉기의 형태로 발생해 1946년 12월 중순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북의 경우 1946년 10월2일에서 6일 사이 22개 군에서 주민 봉기가 발생했는데 영천은 봉기가 가장 격렬했던 곳 중 하나이다. 당시 영천지역 봉기가 격렬했던 원인은 영천이 논농사지역으로 농민들의 지주소작관계에 대한 갈등, 귀환동포 유입 등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 등으로 발생한 민생문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했으며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영천의 봉기는 10월5일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부대 등 지원경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영천에서는 12월8일까지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된 사람 가운데 9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또한 이 무렵부터 이듬해인 1947년 봄까지 3~4개월 동안 화북면 등지에서 충남경찰부대의 진압과정에 민간인이 다수 살해되었으며 경찰의 진압과는 별도로 이 지역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원과 현지 우익단체 청년단원들이 봉기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집단폭행하는 사건도 자주 있었다.(‘진실화해위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2009에서 인용)
이에 따라 1기 진실화해위는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과 별개로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후부터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전까지 군경 토벌과정에 경북 영천에서 구석이 등 11명을 포함한 민간인 200여명이 경찰, 국군, 서북청년단과 호림부대에게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180/imgdb/child/2024/0116/53_17053980971276_2024011650343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32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76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807.jpg)






![전시엔 즉결처분 가능? 거짓 주장 굽히지 않는 김광동 [현장에서] 전시엔 즉결처분 가능? 거짓 주장 굽히지 않는 김광동 [현장에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212/127/imgdb/child/2023/1020/53_16977667617155_2023102050099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