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사건 당시 책임자들 한결같이 “무서운 중정에 어떻게…” 발뺌
“아무리 중정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 있더라도, 내가 좀더 적극적으로 얘기했더라면…. 책임을 통감합니다.” 1971년 8월 실미도사건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아무개씨.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가 지난해 8월 조사착수 이후 만난 사건 관계자 수십명 가운데 자신의 책임을 거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당시 중정의 해외 및 대북공작 총책을 맡았던 이아무개 1국장은 “내가 당시 어떤 지위에 있었는데 그 정도 사건을 알겠느냐. 그건 공작단장이 다했지. 자세한 것은 공작단장에게 물어봐라”라고 책임을 떠넘겼다고 한다. 대북공작분야에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던 윤아무개 당시 대북공작단장은 “공군총장이 육군은 특수부대원 몇백명이고, 해군도 몇십병인데 공군총장 체면좀 살려달라고 해서 공군이 특수부대를 운영하게 된 것”이라며 공군에게 화살을 돌렸다. “매월 25일 중정내 파견된 각군 공작담당관이 실미도 등 특수부대 운영상황을 보고해 존재자체는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중정내 실무자가 파악하고 있어서 잘 몰랐다. 사고가 난 8월23일 보고를 받고 실미도 부대라고 직감해 공군에 연락했더니 하나같이 내용을 모르고 있더라. 공군이 부대운영을 엉망으로 해서 난 사건이다.” 같은 육군첩보부대(HID) 출신인 이씨와 윤씨는 실미도사건 2년뒤인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무책임자와 현장책임자로 참가했다고 <동아일보>가 98년 보도한 바 있다. 부대창설 당시 공군총장이었던 장아무개씨는 “우리가 미쳤어요. 우리가 중정지시 없이 그런 부대를 운영하게….”라고 되받아쳤다. 사건당시 공군총장이었던 김아무개씨는 “총장이 되고 실미도 부대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고 기가막혀 알아봤더니 중정이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1971년초 정아무개 국방장관을 두번이나 만나 “부대를 없애든지 제대로 운영하게 해달라”고 두차례나 건의했으나 “지금 바쁘니까 대통령 선거 끝나고 보자”고 묵살했다. 결국 그해 8월23일 사건이 터졌다.
정 당시 국방장관은 2001년 한 신문에 실린 회고록에서 “국방장관도 모른 부대가 일으킨 사건으로 국회가 불려가 곤혹을 치르고나서 해임됐다”고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했다. 당시 공군정보국장이었던 이아무개씨는 사건당일 중정의 이아무개 국장이 불러 함께 헬기를 타고 현장을 둘러봤다고 한다. “엄청난 호통을 각오했는데 의외로 차도 같이 마시며 호의적으로 대해줘 내가 책임을 떠 맡겠다고 했다. 예산도 우리가 쓴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중정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진상규명위 관계자가 “알아서 긴 것 아니냐”고 힐난하자 그는 “중정이 그때 그렇게 무서웠다. 공군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한 공군방첩부대(OSI)장도 “모든 것을 공군이 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는 것이 당시 공군의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검찰부장으로 최근까지 거물급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김아무개씨는 진상규명위의 면담요청마저 거부했다. “내가 만날 필요가 있느냐”는 의사만 간접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진상규명위는 그에게서 유가족들에게 재판사실도 알리지 않고 주검마저도 왜 인도하지 않았는지, 재판절차의 정당성을 묻고 싶었다는 것이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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