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주민인 조선례 할머니와 큰아들 민병대씨가 8일 오후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는 자신들의 논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평택/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50년 전에도 내쫓더니 억울해서 내 발로는 못떠나”
52년 할주로 들어선다고 미군 불도저가 집 밀어버려 쫓겨난 주민들 바닷물 막아 개간 “이 논이 어떤 논인데”
“이젠 갈 곳 어딨어? 불도저로 밀면 집에서 죽는 수밖에”
“죽지 않고 이런 일을 당하니 세상이 분하고 원통한 게 이루 말할 수가 없지.”
미군기지 확장·이전 예정지인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사는 올해 89살의 조선례 할머니는 요즘 철조망 너머 갇힌 논에 싹이 돋았는지가 늘 궁금하다.
“볍씨는 뿌렸어. 몹시 궁금한데 철망을 쳐놓고 저 요란을 떠니 싹이 돋았는지 알 수가 있나. 남의 논 봤더니 아직은 안 났더라구.” 마을에서 최고령자 축에 드는 조씨 할머니는 요즘 가슴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군과 경찰이 투입된 뒤 젊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도 몹시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가 미군기지 때문에 쫒겨나는 신세가 된 것은 벌써 두번째다. “어떻게 정부라는 게 세상에 그런가. 남의 나라 가서 살아도 이보단 낫겠소.” 주름진 얼굴에 진한 슬픔과 분노가 묻어난다.
조 할머니가 17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 살던 곳은 현재는 캠프 험프리스 기지 활주로로 바뀌었다. “150호 정도 살았을까, 추석을 지내고 얼마 안돼 미군 활주로가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어느날 미군 불도저들이 10대쯤 나타나 집을 밀어버렸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남편을 사별하고 어린 세 아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할머니는 그렇게 쫓겨나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미처 집이 헐리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 하지만 먼저 집이 헐린 사람들은 갈 데가 어딨어? 앞은 바다고 뒤는 비행장이고, 그래서 산으로 가서 겨울을 났어.” 땅을 파 움막을 짓고 지붕에는 떼를 입혀 간신히 추위를 막았다. 헐린 집에서 나오면서 들고 나온 잡곡으로 연명했다. “돼지 우리나 마찬가지였지.” 할머니는 논 600평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주인과 3·7제로 나눴지만 일년 소출은 쌀 몇 가마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을 앞 개간에 나섰다. 며칠 전 원인 모를 불이 난 대추리 이장 집 외양간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때였다. 주민들은 죽을 힘을 다해 삽과 지게, 가래만을 가지고 둑을 만들어 바닷물을 막고 흙을 메웠다. “모를 집어넣으면 죽었어. 2~3년 묵혔다 다시 심어보면 또 죽어. 벼가 빨갛게 타죽는 거야. 밑이 짜니까. 그러다 밤에 둑이 터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맨손으로 나가서 바닷물을 막았지. 이 논이 그렇게 만든 논이여.” 홀몸으로 세 아들을 공부시키고 출가까지 시킨 조 할머니는 6900평의 논을 마련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날아든 국방부의 토지 수용 통보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 땅을 개간할 때 지들이 나타나 본 적이 있길 하나? 왜 몇 번씩 쫓겨난 죄없는 사람들을 나라가 또 괴롭히는 거야.” 조 할머니는 다음달까지 살던 집에서 퇴거하라는 통보도 받았다. “보상 보상 하는데, 이젠 억울해서라도 내 발로는 못 떠나.” 조 할머니는 600여일 넘게 계속돼온 마을 촛불집회에도 꼬박꼬박 나간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땅 빼앗는 것은 똑같다는 조 할머니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이번에 다시 쫓겨나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기 어려운 듯 했다. “이제 나갈 곳이 어딨어. 불도저로 밀고 들어오면 집에 앉아 있다가 죽는 수밖에…” 평택/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미처 집이 헐리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 하지만 먼저 집이 헐린 사람들은 갈 데가 어딨어? 앞은 바다고 뒤는 비행장이고, 그래서 산으로 가서 겨울을 났어.” 땅을 파 움막을 짓고 지붕에는 떼를 입혀 간신히 추위를 막았다. 헐린 집에서 나오면서 들고 나온 잡곡으로 연명했다. “돼지 우리나 마찬가지였지.” 할머니는 논 600평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주인과 3·7제로 나눴지만 일년 소출은 쌀 몇 가마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을 앞 개간에 나섰다. 며칠 전 원인 모를 불이 난 대추리 이장 집 외양간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때였다. 주민들은 죽을 힘을 다해 삽과 지게, 가래만을 가지고 둑을 만들어 바닷물을 막고 흙을 메웠다. “모를 집어넣으면 죽었어. 2~3년 묵혔다 다시 심어보면 또 죽어. 벼가 빨갛게 타죽는 거야. 밑이 짜니까. 그러다 밤에 둑이 터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맨손으로 나가서 바닷물을 막았지. 이 논이 그렇게 만든 논이여.” 홀몸으로 세 아들을 공부시키고 출가까지 시킨 조 할머니는 6900평의 논을 마련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날아든 국방부의 토지 수용 통보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 땅을 개간할 때 지들이 나타나 본 적이 있길 하나? 왜 몇 번씩 쫓겨난 죄없는 사람들을 나라가 또 괴롭히는 거야.” 조 할머니는 다음달까지 살던 집에서 퇴거하라는 통보도 받았다. “보상 보상 하는데, 이젠 억울해서라도 내 발로는 못 떠나.” 조 할머니는 600여일 넘게 계속돼온 마을 촛불집회에도 꼬박꼬박 나간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땅 빼앗는 것은 똑같다는 조 할머니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이번에 다시 쫓겨나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기 어려운 듯 했다. “이제 나갈 곳이 어딨어. 불도저로 밀고 들어오면 집에 앉아 있다가 죽는 수밖에…” 평택/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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