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성북동에 북향으로 지어진 심우장. 만해는 그 음지에서 조국 해방의 희망을 북돋웠다.
‘돌집’ 등진 북향집 그칠줄 모르고 탄 ‘님의 구국혼’ 서울 성북동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달동네를 오른다. 좁디좁은 골목길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른 집이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가 54살에 지어 65살에 입적할 때까지 산 집이다.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만해에게 소는 무엇일까. 만해가 심우장에서 한 첫 작업은 〈유마경〉 번역이었다. 붓다 당시 유마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을 남긴 재가 거사다. 〈유마경〉에선 붓다의 수제자 사리자를 비롯한 10대 제자들이 유마거사에게 쩔쩔맨다. 유마는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의 몸이었지만, 이미 ‘자타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의 ‘대승(불교)’을 체화했기에 불도를 이룬 강물조차 한입에 들이마신 큰 바다였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참선 수행해 1917년 스승 만화 선사로부터 ‘한입으로 온 바다(萬海)를 다 마셨다’고 ‘만해’라는 법호를 받은 ‘선사’였던 그는 다시 중생들의 ‘고해바다’에 뛰어들었다. 일제 앞잡이 잘못 몰려
독립군에 두번 죽을 고비
훗날 사죄하자
“씩씩해서 맘 놨네” 격려 만해는 나라와 자유를 잃고 핍박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의 중생들의 아픔에 평생 열병을 앓았다. 만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인했으나 18살에 백담사로 출가했고, 잠시 홍성에 돌아왔다가 24살에 재입산한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만해는 젊은 시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세계지리책을 읽고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안 만해는 27살에 세계일주여행을 단행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곳에선 일제에 쫓겨 고향을 등진 대한의 청년들이 머리 깎은 사람만 보면 ‘왜놈 앞잡이인 일진회원일 것’이라며 뭇매를 때려 죽이거나 산 채로 바다에 수장했다. 만해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격투 끝에 사지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32살 때는 만주에 갔다가 다시 ‘왜놈의 첩자’로 몰려 독립군에게 총을 맞았다. 이때 맞은 여러 발의 총알이 목 부위에 박혀 있어 만해의 목은 평생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몰려 죽을 뻔한 두 시기 중간엔 일본의 은혜를 입었다. 1908년 도쿄에 조동종이 세운 대학에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공부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같은 개인적인 수난과 은혜에 의해 친일 또는 친미, 반공 등의 노선을 오갔다. 그러나 만해는 달랐다. 총을 쏜 독립군 청년이 훗날 만해를 찾아와 사죄하자 그는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씩씩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나는 이제 맘을 놓게 됐다”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는 늘 스스로 지옥의 문지기가 되기를 마다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대중 공양 도중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한일병합 소식듣고 울분
“밥이 먹어가느냐” 밥상 걷어차
민족대표 죽음 두려워하니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 똥물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