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참사’ 소방대원 박생만씨-생존자 신현호씨 만남
‘여수참사’ 소방대원 박생만씨-생존자 신현호씨 만남
“긴박하고 안타까운 새벽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망자보다는 생존자가 많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여수출입국관리소 화재 현장에 출동해 보호실 6곳중 5곳의 쇠창살을 열고 40여명을 구조했던 전남 여수소방서 구조대원 박생만(35·사진 왼쪽)씨. 그는 12일 광주 전남대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국동포 신현호(55·오른쪽)씨를 만나자 금새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사망 가능성이 높은 부상자의 상태를 72시간까지 점검해야 한다는 소방방재청 훈령에 따라 광주로 옮겨진 8명의 병세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는 애초 수용됐던 방을 묻다가 부상자 가운데 체격이 유난히 작았던 신씨를 알아봤다. 키 155㎝ 몸무게 50㎏으로 체격이 작달막한데다 호주머니에 족보를 간직했던 신씨는 숨가뿐 구조 순간에도 그의 뇌리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305호 화장실에 쓰러진 이들을 밖으로 옮기는데 한분이 무척 가벼웠어요. 운동복 왼쪽 주머니에 책자같은 게 있었구요. 나이도 들고 체격도 적어 소생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지요.”
구조 당시 상태가 심각했던 신씨는 광주 조선대병원을 거쳐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놀랄 만큼 빠른 회복세를 보여 일반병실에 입원할 정도로 호전됐다. 신씨는 그를 통해 화급했던 구조 순간을 전해듣고는 “하마터면 세상 뜰 뻔 했는데 용감한 젊은이 덕분에 살아서 고향(흑룡강성 치치하얼)으로 돌아가게 됐다”며 안도했다.
이렇게 구조대원이 사고 현장이 아닌 병원에서 부상자를 만나는 인연을 이어가는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통상 소방서 당직관이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상자가 많아 일손이 달리면서 구조대원인 박씨까지 출장근무를 하는 바람에 두번째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가망 없으리라 여겼던 신씨가 살아서 회복하는 걸 보고는 가슴이 뿌듯했어요. 구조대원으로서 보람과 자부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일요일 당직이던 그는 11일 새벽 4시5분 출동 명령을 받고 4분 뒤 3㎞ 떨어진 여수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 직원들의 안내로 건물에 진입했을 때 3층 보호실 주변은 온통 검은 연기가 들어차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서둘러 열쇠 뭉치를 넘겨받은 뒤 어두운 미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군가 쇠창살을 두드리며 우리말로 ‘살려달라’고 고함을 질렀어요. 그쪽으로 뛰어가 보호실(302·303호) 2곳을 열고 수용자 한명한테 어깨를 잡도록 해서 기차놀이하듯 빠져나왔지요.” 이어 그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맞은편 통로에 있던 보호실 3곳(304~306호)의 이중으로 잠긴 창살도 차례로 열었다. 화재 현장과 근접해 연기가 곧바로 퍼졌던 이곳의 수용자들은 이미 질식해 나무토막처럼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는 뒤이어 도착한 동료들과 함께 사상자들을 밖으로 옮기느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동안에 불은 꺼졌지만 남아있을 지 모를 생존자를 찾느라 보호실 6곳을 두루 돌며 추가 수색도 벌였다. “수색을 마치고 물마시러 나와서 시계를 처음으로 봤어요. 아침 6시30분이었어요. 두시간 반이 쏜살같이 흘렀더군요. 온몸은 땀에 절어 파김치가 됐구요. 아마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새벽으로 남을 겁니다.” 2003년부터 구조대로 활동 중인 그는 “신씨가 생존한 것은 물을 온몸에 뿌리고 젖은 수건으로 입·코를 가렸기 때문”이라며 “상황이 급박해도 신씨처럼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희생이 줄었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누군가 쇠창살을 두드리며 우리말로 ‘살려달라’고 고함을 질렀어요. 그쪽으로 뛰어가 보호실(302·303호) 2곳을 열고 수용자 한명한테 어깨를 잡도록 해서 기차놀이하듯 빠져나왔지요.” 이어 그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맞은편 통로에 있던 보호실 3곳(304~306호)의 이중으로 잠긴 창살도 차례로 열었다. 화재 현장과 근접해 연기가 곧바로 퍼졌던 이곳의 수용자들은 이미 질식해 나무토막처럼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는 뒤이어 도착한 동료들과 함께 사상자들을 밖으로 옮기느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동안에 불은 꺼졌지만 남아있을 지 모를 생존자를 찾느라 보호실 6곳을 두루 돌며 추가 수색도 벌였다. “수색을 마치고 물마시러 나와서 시계를 처음으로 봤어요. 아침 6시30분이었어요. 두시간 반이 쏜살같이 흘렀더군요. 온몸은 땀에 절어 파김치가 됐구요. 아마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새벽으로 남을 겁니다.” 2003년부터 구조대로 활동 중인 그는 “신씨가 생존한 것은 물을 온몸에 뿌리고 젖은 수건으로 입·코를 가렸기 때문”이라며 “상황이 급박해도 신씨처럼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희생이 줄었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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