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스님
[가신이의 발자취]
간첩누명 17년 옥살이 보광스님
간첩누명 17년 옥살이 보광스님
지난달 27일 오전 9시, 대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중부분소 부검실에 장삼을 입은 주검이 놓여있었다. 주인은 충북 청원 한 암자에서 숨을 거둔 보광 스님. 속세명은 이상철(58). 막내동생 이영철(45·가명)씨 눈에는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스님이 이상철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남긴 것은 ‘빨갱이’ 재판기록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인생도, 가정도, 자식마저도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날은 ‘음력 정월 열흘’ 쉰여덟 생일날이었다.
이영철씨는 “제 기억에 형이 활짝 웃은 건 결혼해 형수 고향 거제에 정착해 남매 낳고 농수로공사를 도급 맡아 경제 형편이 좋아지자 동생들을 불러 ‘같이 살자’고 한 82년 가을께 단 1번뿐이었다”며 “형이 너무 가엾다”고 했다.
고인은 1983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됐다. 그는 △거제도 주변 해군·해경 경비상황 △국가중요시설인 옥포조선소 동향을 보고하는 등 간첩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스물두살 때인 1971년 오징어잡이배 기관장으로 조업하다 울릉도 공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북한 경비정에 피랍돼 대남공작초대소에서 ‘간첩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1년여 뒤 귀환해 받은 당국의 조사과정에서 무인포스터를 통한 공작원 접촉방식, 암호수신 등 특수교육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오징어잡이배 북 피랍, 졸지에 간첩혐의
가족 뿔뿔이 흩어져 속세와 연 끊고 출가
아들·딸에 용서 빌고파 보안법 재심청구 당시 초대소에서 같이 교육받은 김아무개씨가 대공당국에 검거돼 이런 내용이 드러나자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고정간첩이 됐다. 이후 별거하던 부인은 남매를 데리고 재혼했고,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형제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둘째 동생은 86년 숨졌다. 1998년 출소한 그는 6살 이후 만나지 못한 큰딸에게 전화로 출가 뜻을 밝히고 그길로 스님이 됐다. “형의 일생은 모진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함경도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여 월남했는데 1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됐습니다. 어머니와 네 동생을 위해 14살 나이에 멸치잡이 어부가 됐어요. 어머닌 형이 19살때 돌아가셨습니다.” 이영철씨는 “형은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평생 혼자 짊어지었는데, 제대로 이해해 드리지도 못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보광 스님은 출가해서도 한가닥 속세의 끈은 놓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재심 청구가 그것이다. 6살, 4살에 생이별한 남매에게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 아버지 구실을 다 못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전 그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찾아 “특수교육 내용을 발설하면 이북에 사는 숙부는 물론 내 가족 안전을 보장 못한다는 위협을 받아 밝히지 않았을 뿐 간첩활동은 하지 않았다”며 “당시 군부대에서 30여일 감금돼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수사관 요구대로 자술했을 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충북 청주병원의 빈소를 지키던 아들(28)은 “아버지가 지난 1월 찾아오셨는데 만나지 않은 게 통한이 된다”며 통곡했다. 23년여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아들이 차린 첫 생일상은 발인제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유골을 집 근처 납골당에 모시고 이제부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주검은 이날 오후 화장됐다. 대전/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가족 뿔뿔이 흩어져 속세와 연 끊고 출가
아들·딸에 용서 빌고파 보안법 재심청구 당시 초대소에서 같이 교육받은 김아무개씨가 대공당국에 검거돼 이런 내용이 드러나자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고정간첩이 됐다. 이후 별거하던 부인은 남매를 데리고 재혼했고,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형제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둘째 동생은 86년 숨졌다. 1998년 출소한 그는 6살 이후 만나지 못한 큰딸에게 전화로 출가 뜻을 밝히고 그길로 스님이 됐다. “형의 일생은 모진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함경도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여 월남했는데 1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됐습니다. 어머니와 네 동생을 위해 14살 나이에 멸치잡이 어부가 됐어요. 어머닌 형이 19살때 돌아가셨습니다.” 이영철씨는 “형은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평생 혼자 짊어지었는데, 제대로 이해해 드리지도 못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보광 스님은 출가해서도 한가닥 속세의 끈은 놓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재심 청구가 그것이다. 6살, 4살에 생이별한 남매에게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 아버지 구실을 다 못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전 그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찾아 “특수교육 내용을 발설하면 이북에 사는 숙부는 물론 내 가족 안전을 보장 못한다는 위협을 받아 밝히지 않았을 뿐 간첩활동은 하지 않았다”며 “당시 군부대에서 30여일 감금돼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수사관 요구대로 자술했을 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충북 청주병원의 빈소를 지키던 아들(28)은 “아버지가 지난 1월 찾아오셨는데 만나지 않은 게 통한이 된다”며 통곡했다. 23년여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아들이 차린 첫 생일상은 발인제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유골을 집 근처 납골당에 모시고 이제부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주검은 이날 오후 화장됐다. 대전/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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