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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가난하지만 인심좋아 살만했는데…또 어디로 가나

등록 2007-12-25 20:08수정 2007-12-25 20:12

서울 성북2동 주민들이 지난 23일 김정숙 통장 집에 모여 점심밥을 먹고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을 나누며 사는 이곳의 공동체도 사라질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종근 기자 <A href="mailto:root2@hani.co.kr">root2@hani.co.kr</A>
서울 성북2동 주민들이 지난 23일 김정숙 통장 집에 모여 점심밥을 먹고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을 나누며 사는 이곳의 공동체도 사라질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재개발 유랑민-굿바이 성북 (상)
낡은 집을 허물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이 도시의 얼굴을 세련되게 바꿔왔다. 하지만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재개발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재앙과 다름없다. 재개발에 밀려난 이들은 ‘유랑민’처럼 떠돈다. 주민의 삶에 밀착한 인간적인 재개발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서울 성북구의 사례를 통해 재개발의 이면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반찬 나누고 독거노인 돌보던 경치좋은 달동네
불도저에 밀려 터전 잃고 아파트 입주 꿈도 못꿔
“떠나기 싫지만 다시 뿔뿔이…누굴 위한 개발인지”

재개발 유랑민 굿바이 성북
재개발 유랑민 굿바이 성북
서울 성북구 성북2동은 북악산 서울성곽으로 가는 오르막에 낮게 엎드려 있는 달동네다. 좁은 골목을 끼고 다닥다닥 붙은 다가구 주택은 성곽 쪽으로 갈수록 더 허름하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면, 달동네는 성북동 고급 주택단지와 마주 보고 있다. 두 동네의 집값이야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녹지가 많고 조용하며 공기 맑은 것은 그쪽이나 이쪽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산비탈이라 관절염을 앓고 있는 이경자(70·여)씨와 같은 주민들이 걸어다니기엔 불편하다. 이씨는 거동이 어려워 혼자 음식을 차려 먹기도 힘들다. 이웃들이 이씨를 위해 틈틈이 반찬 따위를 가져온다. 올해도 동네 이웃 5명이 김치를 40포기나 담았다며 한통을 놓고 갔다. 동네에서 이씨와 마주친 이아무개(69·여)씨가 “남편의 가래가 심하다”고 말하자, 이씨는 “우리 집에 생강 끓여놓은 것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50년 동안 이 곳에서 함께 산 이웃 사촌이다. 인심이 후한 것은 뛰어난 경치와 함께 이 동네의 자랑이다. 주민들은 종종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천막 딸린 평상에 모여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곤 한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넘치는 이곳의 모습도 머지 않아 바뀌게 된다. 성북2동은 ‘성북2구역’이란 이름으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녹지가 많아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공사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2004년 9월 재개발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승인이 났다. 염아무개(66)씨는 “주민들이 다 가난해서 재개발되면 입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며 “떠나기 싫지만 다들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개발로 떠난 사람들이 어디로 갈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신호철(52)씨가 그런 ‘재개발 유민’의 행적을 잘 보여준다. 한때 탄탄한 주방용품 공장 사장이었던 신씨는 몇 차례 부도를 겪으며, 서울 중랑구 중화동 53평 자택에서 성북구 월곡동 달동네의 2천만원짜리 전세집으로, 그리고 지금의 성북구 석관동 월세 지하방으로 옮겨 살고 있다. 월곡동에서 살 때 그곳이 재개발되면서 임대아파트 입주 자격을 얻었지만 딸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입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석관동도 재개발된다. 거주기간이 모자라 이주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신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그는 “임대아파트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악물고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다”며 “안정적으로 살 곳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월곡동에 살다가 재개발에 쫓겨 성북구 종암동을 새 보금자리로 삼았던 이들도 채 3년이 안돼 다시 재개발에 밀려나고 있다. 주민들이 떠나고 휑한 ‘종암5구역’ 재개발 지구엔 이사할 곳을 찾지 못한 3가구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김옥자(56)씨는 “뉴타운이니 재개발이니 뭐니 해서 집 없는 철거민들은 갈 곳조차 없다. 재개발을 안 하는 곳이 없고, 재개발을 안 하는 곳은 집값도 부르는 게 값이니 …”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30여년 동안 해 온 택시운전도 접은 한아무개(56)씨는 “최소한 사람이 살 곳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은 거주기간이 모자라거나, 빚 독촉 등을 피하려 다른 곳으로 주소지를 옮겨놓은 이들로 이주 보상을 받지 못한다.

성북구에서 추진했거나 추진되고 있는 주택 재개발은 모두 74건으로, 서울시 전체 423건의 17%에 해당할 정도로 많다. 모두 ‘철거’를 전제로 한 전면 재개발 방식이어서 높은 분양가를 부담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재정착하기 어렵다. 공공임대아파트 공급 물량도 7151호로, 전체 재개발 구역의 세입자수 2만5457명의 28%에 지나지 않는다.

성북주거복지센터 등 성북구의 6개 지역사회단체는 지난달 성북구 재개발 예정 지역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주거환경을 조사하고 지역 주민들과 인터뷰를 해 ‘성북구 개발지역 생태적 맵핑’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는 “노후 주택을 개·보수하거나 도로 등 기반시설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지역 사정에 맞게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데, 대부분 철거를 통한 전면 재개발을 하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서로를 의지하던 공동체도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고 읊었지만, 성북구에 한창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본래 살던 가난한 이웃들만’ 살 집을 잃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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