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오른쪽 뒷모습)이 22일 오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국제회의장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읽고 기자회견장을 떠나자,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려고 연단으로 나오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예상밖 특단 조처…실질소유-경영 분리 땐 ‘재벌 새 역사’
일각선 승계구도·과거비리 등 언급 없어 ‘진정성’ 의심
일각선 승계구도·과거비리 등 언급 없어 ‘진정성’ 의심
쇄신안 의미와 평가
“오늘부터 물러나기로 했습니다”라는 이건희 회장의 대국민 사과로 시작된 삼성 쇄신안은 국민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 회장의 퇴진과 전략기획실(전기실·옛 구조조정본부) 해체,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사퇴로, 여론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모양새다. 삼성이 과거의 비리와 불법을 끊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변화 가능성을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삼성의 약속 이행을 전제로 한다면, 20년간 이어진 ‘이건희 시대’의 막이 사실상 내리는 것이다. 구조본과 순환출자를 두 축으로 한 ‘황제경영’이 투명성이라는 대세에 밀려나는 셈이다.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의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이행만 된다면 획기적인 수준”이라고 평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전략기획실-계열사’라는 기존 삼각편대 체제가 해체되고, 각 계열사 독립경영체제로 바뀐다. 계열사 사장단회의가 협의체로 운영된다. 새 경영체제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단행한 재벌개혁과 유사해 보인다. 일본의 재벌개혁은 총수일가 지배 종식-그룹 단위의 의사결정 구조 해체-협의체 성격의 사장단회의 운영을 뼈대로 한다. 전기실의 윤순봉 부사장은 “이번 조처는 과도기적 성격이 아니다”라며 “인사 등 모든 의사결정은 주총과 이사회에서 결정한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소유-경영 분리로 이어진다면 한국 재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다. 다른 재벌들도 파급 영향을 가늠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삼성은 이 회장과 전기실 수뇌부를 ‘삼성의 심장’에 비유하며 퇴진에 부정적 태도를 지켜왔다. 삼성의 태도 전환은 이번에도 2006년 2·7 대국민 사과 때처럼 미봉책을 내놨다가는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어렵다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쟁점 중에서 빠진 것이라면 이 회장의 아들인 재용씨로의 경영권 승계 부분이다. 재용씨는 삼성전자의 고객총괄책임자(CCO)에서 물러나 외국 현장 경험을 더 쌓기로 했다. 재용씨가 일정 시점 뒤 이 회장의 뒤를 잇는 구도라면, 승계구도가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전기실의 설명은 다르다. 한 고위임원은 “이 회장이 물러나고, 전기실이 해체되면 재용씨가 무슨 방법으로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학수 부회장이 이 회장의 말을 빌려, “재용씨가 아직 경영수업 중이고 주주와 임직원으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설명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재용씨가 자동으로 경영권 승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영능력의 검증을 통해 경영권을 쥘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한다는 논리다.
쇄신안 발표 이후 삼성은 비자금 폭로 이후 6개월 가까이 마비된 그룹 경영을 조기 정상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전기실의 윤 부사장은 “투자계획 확정은 이른 시일 안에 하고, 인사도 5월 중에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룹 경영에 큰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에, 연착륙 여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이에 대해 이학수 부회장은 “각 사 경영진들의 능력이 충분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쇄신안이 삼성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라고 보기에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조처를 그룹 해체로 단정하거나 소유-경영 분리로 단정짓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이 회장이 완전히 물러난 것인지, 과거 다른 그룹처럼 일시적 퇴진에 불과한지 분명하지 않고, 승계구도는 실제 아무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여론이 잠잠해진 뒤 이 회장의 복귀와 구조본의 부활을 점치는 이들도 있다. 이 회장의 나이로 볼 때 과도기를 거친 뒤 재용씨로의 경영권 승계가 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헐값 매입이 드러난 에버랜드 등의 주식 처분과 무노조 경영의 개선이 빠진 것도 거론된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쇄신을 한다면서 과거 비리를 깨끗이 털어놓지 않아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삼성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느냐 여부는 앞으로 노력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은 이와 관련해 “삼성의 쇄신은 완성된 게 아니고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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