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 보상·지원도 못받아…“제헌절 반갑지 않아”
1948년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한 제헌의원들 가운데 전북 고창에서 당선된 김영동 의원(1907~?)의 아들 김흥수(62)씨는 ‘17일 제헌절’이 달갑지만은 않다. 1948년 5월 남한에서 치러진 첫 총선에서 뽑힌 제헌의원들 198명 가운데, 40명가량이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고 그 가족들은 말한다. 김 의원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상범으로 몰려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왔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지요.” 아들 김씨는 16일 지난 세월을 이렇게 떠올렸다.
제헌국회가 꾸린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반민특위) 활동에 참여하던 김 의원은 이승만 정부가 서울에서 한강 다리를 폭파하며 후퇴했을 때 함께 내려오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는 ‘월북인지, 납북인지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1969년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결혼 10년여 만에 외아들인 저를 봤고, 자동차 판매업을 하며 고창 땅에만 수천평 땅을 가진 소문난 재산가였는데 월북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2년 <동아일보>가 1962년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납북된 의원 김영동씨 등이 막노동에 시달리고 탄압받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도 근거로 들었다.
김씨는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진 끝에 ‘아버지가 항일운동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전직 의원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헌정회’는 누리집에 김 의원을 “북간도, 연길, 용정, 연해주에서 광복 운동을 하다 투옥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세가 기울어 김씨는 등록금이 없어 더 진학하지 못한 채 중졸 학력으로 시계공으로 일하고 탄광촌 막장에서도 일했다고 했다.
“헌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결성했던 의원을 납북됐다는 이유만으로 버려둔 정부가 원망스럽습니다.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친일파들은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납북된 제헌의원 40여명의 가족은 잊혀진 채 지금도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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