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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누울 자리만 있다면 왕십리서 살고 싶소”

등록 2009-09-30 14:37수정 2009-09-30 14:52

1기 뉴타운 왕십리 세입자들 어디로 갔나
강정희 할머니, 왕십리 떠나 ‘성남→아산’ 타향 살이
돈에 맞춰 집 구하다 생긴 ‘외로움병’엔 약도 안들어
찾아오는 이 없는 강정희(83) 할머니의 하루는 길다. 이부자리 발치에 놓은 전화기 앞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는 충남 아산시의 15평짜리 아파트에 혼자 산다.

“어서 왕십리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매일 성동구청에 전화를 해대니까 이제 거기 아가씨가 내 목소리를 알어. 올겨울엔 임대아파트에 꼭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강 할머니는 ‘왕십리 뉴타운 사업’이 본격화된 지난해 5월 ‘제2의 고향’인 왕십리를 떠났다. 그가 왕십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부모님 손잡고 경기도 안양에서 이사를 온 8살 때다. 할머니는 그때를 일제강점기이던 ‘쇼와 9년’(1934년) 쯤으로 기억한다.

그 뒤 할머니는 1·4 후퇴 때 피란을 떠났던 5년을 빼고 인생의 대부분을 왕십리에서 보냈다. 하왕십리 1동 굽이굽이 꼬인 골목길은 지금도 눈을 감고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다닥다닥 붙은 다가구주택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 사람들은 인심 좋고 정도 많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식당 일을 하며 평생을 보낸 할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싼 집을 찾아 비원 근처 종로구 와룡동 쪽 셋집을 전전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그리워 결국 왕십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뉴타운 바람’에 강 할머니는 왕십리에서 밀려났다. 뉴타운 사업이 시작될 무렵, 그는 평생 식당 설거지로 모은 1400만원을 내고 7~8평짜리 전세방에 살고 있었다. 집주인이 12년 동안 한 번도 전셋값을 올리지 않아 떠날 때 고스란히 1400만원을 되돌려받았지만, 그 돈으론 서울 어디에서도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 성남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매달 40여만원씩 받는 국민기초생활수급비의 절반인 20만원이 빠져나갔다. 그는 “매달 돈이 쑥쑥 빠져나가는 데 겁이 나”, 지난해 9월 전셋집을 구할 수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내려갔다. 주거 이전비로 받은 700만원을 보태 1700만원을 맡겼다. 15평 아파트는 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쓸데없이’ 넓기만 하다.

하지만 더 큰 마음의 병은 외로움이다. 서울에선 매주 찾아와 말동무가 돼 주던 독거노인 도우미와 매달 10만원씩 전해 오던 성당의 교우들이 있었다. “여기는 약도 서울과는 다른 것 같어. 약을 타 먹어도 자꾸 아프기만 해. 외로워서 그런지….”

이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옛 왕십리 이웃들이 구청에 하소연한 끝에 지난 6월 임대아파트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그런 게 있는지도 잘 몰랐다”고 했다. 한달 전쯤 구청에서 전화가 와서, 몇 달 기다리면 왕십리의 한 임대아파트에 추첨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12월에 자리가 나는 임대아파트는 8채지만, 14명의 주민들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 임대아파트의 보증금과 월세는 각각 2000여만원과 15만원 수준으로, 강 할머니가 이곳에 실제로 입주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할머니는 벌써 사는 집을 내놨다. 2년 전세 계약을 한 탓에, 12월에 새로 세 드는 사람이 없으면 집주인에게 170만원을 물어내야 한다. 동네 경로당에서 “화투 치는 데 가입비로 7만5000원을 내라”고 해서, 거기에도 끼지 못한 할머니에게 170만원은 너무 큰돈이다. 강 할머니는 어찌됐든 왕십리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세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도 어떡해? 가야지. 왕십리로 가면 성당 사람들도 있고, 동네 사람들도 있고…. 다들 흩어졌지만 나만큼 멀리 간 사람은 없다고 해. 임대 아파트가 요 방 반쪽만 해도, 누울 자리만 있어도 좋으니 왕십리에서 살고 싶어.”

아산/글·사진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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