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전 시험 보는 타이 고사장서 불법 매수
미국 현지 유학생들에 전송 혐의…수사 확대
미국 현지 유학생들에 전송 혐의…수사 확대
서울 강남의 한 어학원에서 ‘족집게 강사’로 통하는 김아무개(37)씨. 그는 지난해 1월24일 오후 3시(현지시각)께 태국의 한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고사장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김씨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고사장을 나온 한 태국인 응시자에게 50바트(1만5000원)를 쥐어준 뒤, 문제지를 건네 받았다.
그는 곧바로 인근 피시방에 들어가 2시간여 만에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답이 적힌 문제지를 스캔해 전자우편으로 날렸다. 전자우편은 지구 반대편, 미국 커네티컷주에 있는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받았다. 이들은 12시간 뒤 같은 에스에이티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앞서 이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임에도 “족집게 과외를 듣겠다”며 한국까지 들어왔고, 김씨한테서 한 번에 30만~40만원씩하는 고액과외를 열 번 이상 들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18일 시험 문제지를 빼돌려 수강생한테 보내 성적을 올려준 혐의(업무방해)로 학원강사 김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1인당 수백만원이 넘는 고액 과외의 정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족집게 강사’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강사 김씨는 연봉이 1억2000여만원에 이를 만큼 강남 학원가에서 ‘잘 나가는 강사’였지만, 실상은 문제지를 사전에 입수하기 위해 태국으로 나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던 셈이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은 2200점을 넘는 고득점(만점 2400점)을 기록해 미국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일은 에스에이티 시험의 문제가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지만, 시차 탓에 시험 시간이 다르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실제 태국에서는 같은 문제지로 미국보다 12시간 먼저 시험이 치러진다. 시험 주관사인 이티시(ETC) 칼리지보드는 시험지를 고사장 밖으로 들고 나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만, 김씨는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서 시험지 관리가 허술하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학원가에선 이런 헛점을 악용한다는 말이 여러 차례 떠돌았지만, 실제 수사 당국에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고액과외를 진행하고 있지만 혹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부담감에 이런 일까지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며 “김씨가 가르치던 학생이 20여명에 이르는 점과 다른 학원에서도 이런 고액 과외가 성행한다는 점에 주목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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