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시민군 지도부 행적
[‘5·18’ 항쟁 30돌] ‘항쟁 지도부들’ 지금은
1989년 12월31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장.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이 증언대에 섰다. “작전 지휘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그가 말했다. 분노한 정상용 평민당 의원이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부르짖었다. 노무현 민주당 의원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명패를 집어던졌다. 최후까지 광주를 지켰던 시민군 지도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시민군 지도부인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1980년 5월25일 밤 10시 전남도청에서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장례 준비부터 외곽 방어까지 관장한 시민권력이었다. 위원장은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정의감으로 뛰어든 조선대 학생 김종배가 맡았고 상황실과 기획실, 홍보·민원·조사·보급부서, 대변인을 두었다. 여러 일을 10여명이 나눠 맡았다. 30년이 지난 오늘 10명 가운데 4명이 5·18묘지에 누워 있다. 윤상원은 당시 계엄군의 총격으로 산화했다. 김영철은 모진 고문 탓에 정신병원을 19년 동안 전전하다 숨졌다. 박효선은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5월극을 열정적으로 만들다 98년 과로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허규정은 충장로에서 생협을 열었다가 서울로 옮겨 특수도료 업체에 다니다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폭도’로 몰렸던 다른 6명도 광주·서울 등지에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살아남았다는 부채감과 먹고살아야 한다는 부담에 이중으로 짓눌렸다. 정상용은 13·14대 평민당으로, 김종배는 15대 국민회의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청문회 기획과 5월법 제정에 기여했으나 정치권의 주변부로 내몰리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골프장 사장이나 무역업 대표로 변신했다. 박남선은 91년까지 운동권에 몸담다 건설업을 거쳐 10년 전부터 기능성 사료·비료 제조업을 해왔다. 정해직은 교육 민주화 운동에 나서 전교조 초등위원장을 지냈고 2005년 명예퇴직했다. 김준봉은 초기에 전구 제조업체를 다니다 서울에서 전기자재상으로 독립했다. 구성주는 부친의 건자재 일을 돕다 10년 전부터 서울에서 기계설치업에 종사중이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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