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배기 때인 1980년 5월29일 광주 희생자 합동장례식 때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든 ‘꼬마 상주’로서 세계인을 울렸던 주인공 조천호씨가 지난 10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안 추모관에 전시된 자신의 사진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5·18’ 항쟁 30돌
“아버지 가르침 새기며 살 것”
“아버지 가르침 새기며 살 것”
“이 사진은 제 삶을 5월로 끊임없이 연결해준 끈이었지요.”
세계인을 울렸던 ‘꼬마 상주’ 조천호씨는 1980년 당시 5살이었다. 그해 5월29일 광주에선 통한의 합동장례가 치러졌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한 지 사흘째여서 울음소리조차 낮춰야 했다. 그는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아버지 조사천(당시 34살)씨의 영정을 안고 망월동으로 운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당시엔 슬프기보다 배고팠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어요. 지쳐서 영정 사진에 기대 있었던 것 같아요.”
한 외신기자가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상복을 입고 영정 위에 턱을 괸, 슬픔 표정의 꼬마 상주 사진은 독일 <슈피겔>에 실린 뒤 국내로 몰래 반입됐다. 죽은 자와 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한 이 사진은 어떤 살육 장면보다 절절하게 광주의 아픔을 전해주는 ‘5·18의 상징’이 됐다.
조씨는 1987년쯤 앞집 수퍼에 갔다가 이 사진을 처음으로 봤다. 자신이 아닌 것같아 무덤덤했고, 나중에는 이 사진을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사진을 선거 유세장에서 본 할머니가 충격으로 사흘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누구도 이 사진을 입에 올리지 않았죠. 하지만 5월이 오면 사람들이 찾아와요. 사진 때문에 5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거죠.”
조씨는 제대 뒤 5·18묘역 관리소에서 근무하다 광주시청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덧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됐다. 연년생인 세살과 두살 아들을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두 아들이 사랑스러울수록 3대 독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더욱 진해진다. 건축일을 했던 아버지는 전남도청 부근 현장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숨졌다. 아버지의 묘비엔 ‘꼬마 상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버지 잊지 않겠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아버지가 온몸으로 보여준 가르침을 새기며 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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