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실태조사비’ 물거품…신윤순씨, 의원실 돌며 추가대책 요청
지난 7일 국회에서 새해 예산안이 날치기 통과되는 장면을 지켜본 신윤순(66·사진)씨는 일주일을 꼬박 앓아누웠다. 66년의 한을 풀 기회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허탈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린거죠. 마음이 아프니까 몸도 같이 아프더군요.”
신씨는 지난 한달 동안 매일 지하철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국회를 찾아와 행정안전위원회 등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사할린지역 강제동원 희생자 묘지 실태조사’를 위한 예산 마련을 부탁했다.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리겠지’라는 생각에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신씨의 노력은 열매를 맺어, 지난달 22일 행안위 여야 의원들이 사할린 묘지 실태조사를 위한 6억8000만원을 위원회 예산에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안이 날치기 통과되면서 증액된 수정안이 전혀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2007년부터 3년간 사할린 한국인 묘지 실태조사를 벌여 600기를 확인했으나, 예산이 전액 삭감돼 올 들어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올 초 위원회로부터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신씨는 “나라도 나서서 예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의원들을 찾아다니게 됐다. “아무것도 배운 거 없는 할머니가 어디서 힘이 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유족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 거예요.”
신씨의 부친은 그가 태아일 때인 1943년 강제동원돼 50년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마지막 편지를 보낸 뒤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 백봉례(83)씨는 직접 만든 속옷이나 버선을 내다판 돈으로 홀로 딸을 키우며, 아버지가 사할린에서 보낸 첫 월급으로 산 은반지를 손에 낀 채 평생 남편을 기다렸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러시아에 가족이 있으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까닭에 아버지의 강제동원 사실조차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일제 때는 국가가 힘이 없어 버림받고, 해방 뒤에는 이념문제로 버림받고, 지금은 정치싸움에 버림받고…. 나라가 힘없어 국민을 보호 못하고 뺏겼으면, G20도 하고 해외원조도 하는 지금이라도 되찾아와야 하는 게 국가의 의무 아닌가요?”
그는 “4만3000여명이 묻혀 있다는 사할린 21곳의 묘지를 유족들이 일일이 조사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지금이라도 혈육을 되찾고 싶은 건 나뿐 아니라 모든 유족들의 마지막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16일부터 다시 의원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은 기획재정부에 예비비 사용이나 타예산 전용 등 대책 마련을 요청한 상태다.
글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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