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고객 편의’를 앞세울수록 백화점 노동자의 노동강도는 강해진다. ‘화려함의 상징’인 백화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변변한 휴게실 하나 없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고객 폭언에도 무조건 참아라… 오줌보 터져도 고객화장실 쓰지말라…
인권위, 노동자 29명 인터뷰
회사, 감시하며 책임은 회피
소비자, 고충 알면서 화풀이
인권위, 노동자 29명 인터뷰
회사, 감시하며 책임은 회피
소비자, 고충 알면서 화풀이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19년째 일하고 있는 전아무개(36)씨는 6년 전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쇼핑백을 달라던 한 여성에게 ‘100원을 내고 사야 한다’는 규정을 안내했다가 당한 일이었다. 화가 난 그 여성은 반말로 큰소리를 치다가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불만에도 백화점 쪽은 되레 판매사원에게 눈치를 준다.
백화점 쪽이 판매사원의 근무 태도를 몰래 체크하고 이를 근거로 입점업체에 판매사원의 교체를 요구하는 일도 있어, 전씨는 매뉴얼에 따라 인사의 각도, 표정, 시선 처리 등을 늘 신경 써야 한다. 그는 자신이 겪는 일을 남편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홀로 우는 일이 다반사다.
전씨는 “2000년 이후 유통업체 사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친절 서비스 강요도 심해졌다”며 “회사는 우리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례한 소비자들과 기계적인 친절만을 강조하는 회사 사이에서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실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9일 ‘감정노동’(고객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친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을 하는 마트 판매원, 콜센터 상담원 등 여성 노동자 29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판매·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약 301만명에 이른다.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은 소비자들이 폭언을 하거나, 심지어 물건을 집어던져도 무조건 참아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호소했다. 또 휴식이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도 턱없이 모자란 것으로 조사됐다.
백화점 매장 판매사원인 이아무개(21)씨는 “쉴 공간이 없어서 계단이나 복도에서 쉰다”며 “수백명이 일하는 공간에 여자 화장실은 고작 두칸인데, 회사 쪽에선 고객 화장실을 쓰지 말라고 한다”고 토로했다. 또 이들은 회사 쪽이 인사, 말투, 표정 관리 등은 기계적으로 교육하고 감시하면서도 자신들이 고객에게서 받는 피해에 대해선 책임을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런 고충을 알면서도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가 지난 10월 수도권 시민 303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22.3%가 여성 서비스 노동자에게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응답자의 81.2%는 여성 서비스 노동자의 고충을 알고 있었으며, 57.7%는 허리를 깊이 숙인 인사를 받을 때 불편하다고 답했다.
인권위 강은숙 조사관은 “외국에선 우리나라처럼 여성 서비스 노동자를 천대하고 억지 친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없다”며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나 콜센터의 응대 건수 제한 등 감정 소진을 줄일 수 있는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이날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를 발간해 사업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인권위 강은숙 조사관은 “외국에선 우리나라처럼 여성 서비스 노동자를 천대하고 억지 친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없다”며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나 콜센터의 응대 건수 제한 등 감정 소진을 줄일 수 있는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이날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를 발간해 사업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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