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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20년간 수요일마다 일 대사관앞 천번을 울었건만…

등록 2011-12-14 21:36수정 2011-12-14 22:32

스러지는 ‘역사’의 증언 할머니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14일 현재 정부에 등록된 234명 가운데 63명만이 남았다. 할머니들은 떠났지만 증언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 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92년 1월8일’ 30여명이 시작
사죄·배상 호소했지만 묵묵부답
그사이 171명이 또 세상을 떴다
■ 할머니들 가없는 행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상임대표 윤미향·이하 정대협)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열어온 ‘수요시위’가 14일로 1000회를 맞았다. 굳게 잠긴 일본대사관 철문 앞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온 지 20년 세월이 흘렀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최장기 집회 기록이다.

1992년 1월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정대협 회원 등 30여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 등을 요구하면서 수요시위의 역사는 시작됐다.

수요시위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아직 청산되지 않은 일제 강점기 과거사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91년 8월14일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공개 증언에 나선 고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살)의 용기가 수요시위의 밑거름이 됐다. 이후 언론에서 연일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면서 피해자들이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수요시위가 걸어온 길
수요시위가 걸어온 길


수요시위 1000회는 자신이 당한 고통을 후손들이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할머니들의 집념이 있어 가능했다. 할머니들은 노환과 굳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세월 단 한 번도 수요시위를 거르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처음부터 투사였던 건 아니다. 할머니들은 일곱 번째 수요시위부터 참여했는데, 그 당시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얼굴을 가렸다. 1992년부터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어온 김선실 천주교여성공동체 실행위원은 “예전엔 할머니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그동안 맺힌 한을 풀어내느라 2~3시간 동안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고, 이를 듣는 우리도 늘 함께 울었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 사망 추이
‘위안부’ 피해자 사망 추이

시위가 거듭될수록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나 역사 선생님으로 변해갔다. 피해자에서 운동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할머니들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냈다. 지난 2007년 미국 하원에선 일본 정부의 사죄 결의안을 채택했다. 같은해 11월 유럽의회에서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나왔다. 이용수·김군자·길원옥 할머니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엘렌, 필리핀의 메넨 할머니 등이 미국과 벨기에에서 피해 증언에 나섰다.

그러나 수요시위는 서둘러 막을 내려야 할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할머니들의 요구는 일본의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의회의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 일곱 가지다.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위안부 피해 신고자 234명 가운데 생존자는 63명뿐이다. 올해에만 16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정대협은 내년 3월을 목표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개관을 서두르고 있다. 지금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에 터와 건물을 마련한 상태다. 정대협은 박물관을 위안부 피해를 알리고, 평화와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장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1000회에 쏟아진 국민적 관심이 1001회로 계속되었으면 한다”며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져, 시간이 지나더라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학생·아이…일본인 노동자까지1,000,000여명 가슴 시린 동참

■ 함께 한 사람들

지난 9월 열린 986회 수요시위를 주관한 사람들은 경기도 평택에서 온 주한미군 기지촌의 할머니들이었다. 1년 전 처음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한 기지촌 할머니들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감췄다. 생활고를 겪고 있는 사정도 비슷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기지촌 할머니들이 처음 만난 건 2009년 어버이날이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처음엔) 나도 내 잘못인 줄만 알고 가슴을 끓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잘못이 아니더라. 어깨 펴고 다니라”고 다독였다.

수요시위는 애초 어두운 역사 탓에 시작됐지만, ‘찡한 연대’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까지 수요시위를 주관한 사회단체는 186곳에 이른다. 연간 수요시위 참여인원은 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해마다 11월이면 수요시위를 찾는 일본인 노동자도 있을 정도다. 14일에 열린 1000번째 시위에도 외국인·학생·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장효정(40)씨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영상 촬영을 담당하면서 할머니들과 연을 맺었다. 그는 올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도운 숨은 자원봉사자 등에게 주어지는 특별상 ‘나비의 꿈’을 받기도 했다. 장씨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에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는 인식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짬을 내 정대협 번역일을 돕고 있는 일본인 고노 다이스케(41)도 2000년 처음으로 수요시위를 찾았다. 광주광역시 수완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태은(34)씨는 지난 1월 수요시위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뒤부터 ‘위안부’ 피해 역사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씨는 2학기에 ‘위안부’ 피해 역사 교육을 위한 12시간짜리 창의력 재량 수업을 했다. 수완중 3학년 학생 380여명은 10월15일 학교에서 가상의 수요시위와 역사·인권교육 행사를 열었다. 12살 때 일본의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양금덕(83) 할머니는 이날 이 학교를 찾아 학생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현정 정환봉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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