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지난 2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공장 앞에서 ‘쌍용자동차 희생자 범국민 추모대회’ 및 ‘쌍용자동차 4차 포위의 날’ 행사를 준비하며 정리해고 이후 숨진 22명의 동료들을 상징하는 관을 놓고 있다. 위 사진은 추모대회에서 김일섭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 전 노조위원장(왼쪽)과 김남섭 쌍용자동차 노조 사무국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평택/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장대비가 쏟아진 21일 저녁,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열린 ‘쌍용차 희생자 범국민 추모대회’에 참석한 한국지엠(GM) 노동자 김일섭(49)씨는 조용히 누군가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상복을 입은 막내 동생 남섭(41·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씨가 있었다.
2009년 정리해고에 반대해 77일간의 ‘옥쇄파업’에 참여한 남섭씨는 징계해고자가 돼 17년간 일했던 공장에서 쫓겨났다. 당시 쌍용차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2004년 회사를 인수했지만 약속한 투자를 차일피일 미루다, 자금난에 부딪히자 경영권을 포기했다. 외국계 대주주의 경영 실패 책임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됐다. 희망퇴직·정리해고 등으로 일자리를 잃은 쌍용차 노동자는 2600여명이다. 남섭씨는 3년간 복직 투쟁을 하면서 동료와 그 가족 22명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일섭씨는 동생이 느끼는 분노가 낯설지 않다. 11년 전,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 노조위원장이었던 그 역시 정리해고 반대 투쟁 현장에 있었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징계해고 된 일섭씨는 인천 부평공장 일터를 떠난 지 8년 만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쌍용차 파업 당시 금속노조 부위원장이었던 자신의 이력 때문에, 동생이 파업에 동참해 결국 해고까지 당한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늘 무겁다.
충북 제천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일섭씨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 살림 탓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누나가 있던 인천으로 올라가 공장일을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을 만큼 공장 생활은 거칠고 힘겨웠다. 용접 기술을 익힌 그는 1983년 대우조선에 입사해 1989년 대우차로 자리를 옮겼다. 고향 사람들은 다들 반듯하게 자라 대기업에 취직한 김씨네 형제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형제의 삶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요동쳤다. 2000년 부도를 맞은 대우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지엠)와 매각 협상에 앞서 희망퇴직 진행과 함께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당시 노조는 이에 반발해 2001년 2월 인천 부평공장을 점거하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농성 사흘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이 강제 진압되자, 일섭씨와 해고노동자들은 부평공장 인근 산곡성당에서 ‘300명 복직 합의’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투쟁을 이어갔다. 농성을 풀고 경찰서에 자진출석한 그는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남섭씨는 형이 겪은 일이 똑같이 자신에게 닥칠 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은 낯선 단어였다. 쌍용차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노동자들과 가족이 지금 겪고 있는 생계난과 정신적 고통은 이미 대우차 사태 때도 우리 사회를 할퀴고 간 상처였다. 정리해고 명단이 발표된 순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산 자와 죽은 자로 찢겨 나갔다. 실직의 우울함과 생계난은 가정불화나 자살로 이어졌다. 대우차 해고자 아내인 정순희(45)씨는 생후 17개월 된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나서야 했던 당시 상황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보호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때문이다.
정씨 가슴속에서 아물지 못한 11년 전 상흔은, 결국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큰 상처로 덧나 버렸다. 지난 10년간 정리해고·비정규직은 더욱 확산됐고, 고용불안은 커졌다. 실직자에 대한 사회안전망도 여전히 취약하다. 대우차에서 희망퇴직을 한 이들 중에는 다시 부평공장으로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씨는 “대우차 싸움 때는 반드시 정리해고를 막아야 한다는 정서가 강해 여기저기서 연대가 많았다”며 “국민들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이해해줬고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도 있었는데,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은 고립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나마 대우차 사태가 더 큰 비극으로 귀결되지 않은 것은 노사가 정리해고자의 단계적 복직에 합의하고, 이를 이행했기 때문이다. 반면 2009년 ‘무급휴직자 1년 뒤 복귀’ 등의 내용이 담긴 쌍용차 노사간 대타협은 휴지 조각이 됐다. 남섭씨는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해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료 빈소에 갔더니 그 친구 상사였던 팀장이 미안하다면서 왔어요. 거기에 온 다른 희망퇴직자들이 그 팀장을 붙잡고 ‘1년 있다가 복직시켜준다고 해놓고 왜 안 해주느냐’며 울더군요.”
파업 과정에서 경찰특공대 등 공권력뿐 아니라 동료와 극심한 충돌을 빚은 경험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지옥의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 상황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회사가 동료끼리 충돌하게 만들었어요. 쟤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면서 폭력을 휘두르게 하고, 부모를 통해 희망퇴직을 압박하기도 했어요. 이 사회가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게 살아야만 버틸 수 있는 사회인 거예요. 정부는 파업 진압 잘됐다며 공치사나 하고….” 일섭씨는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쌍용차 사태는 다시 한국지엠의 미래가 될지 모른다고 했다. 경기 침체로 가장 큰 부침을 겪는 게 자동차 산업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향을 찾은 일섭씨는 동생에게 어머니 산소 사진이 첨부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할 일 형이 다 할 테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라.” 다른 형제들은 동기 중에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투쟁에 나서는 것에 대해 마뜩잖아한다. 고향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형제간 우애도 예전 같지 않다. 아직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남섭씨에게, 형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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