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식 기자
[현장에서]
“귀관, 예복을 입고 뛰면 안 되는 것 모릅니까!”
1994년 봄, 육군사관학교 1학년 생도였던 기자는 선배 생도의 고함에 똑 얼어붙었다. “우리한테 화랑의식만큼 신성한 것은 없다. 예복 입고 뛰지 마라, 더럽히거나 젖어도 안 된다. 알겠나.” 화랑연병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는 사관생도 신조를 발걸음마다 찍으며 걷는 고행이었다.
서울 노원구 공릉2동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 드넓은 잔디밭에 선 생도들이 지난 8일 마주한 이가 ‘내란의 수괴’와 주모자·동조자들이었다는 점은 끔찍하다. 전두환, 장세동, 정호용, 이학봉, 김진영…. 그들은 ‘위국헌신 군인 본분’을 내팽개쳤고, 국가와 국민과 군보다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떠받들었으며, 끝내 군사반란을 일으켜 시민을 학살하고 헌정을 유린한 이들이 아니던가. 이런 이들이 사열대에서 사관생도들의 ‘받들어총’ ‘우로봐’ 구호를 받고 거수경례로 응답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박종선 육사 교장(육군 중장)은 군사쿠데타의 상징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생도들에게 체험학습을 시킨 것인가. 박 교장에게는 사관생도의 명예나 군의 존재 이유보다 발전기금 200억원과 ‘선배들’이 더 소중한가.
육사 초창기인 1952년 시작된 화랑의식은 생도들의 자율적인 의식이지, 보이기 위한 쇼나 퍼레이드가 아니다. 엄중하고 명예로운 행사인 까닭에 시민들에게 개방해 군의 미래를 긍정하게 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금을 일부 학교에 냈다 해서 아무에게나 ‘최고의 경의’를 표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사관생도로 하여금 내란 수괴에게 ‘분열 의식’을 하도록 한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군의 정신분열증’을 조장하는 것이다.
육사 출신인 박 교장과 김관진 국방장관 모두 기억할 터이다. 화랑연병장 사열대 맞은편에는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려 자신의 몸을 던진 고 강재구 소령 동상이 있다. 화랑의식을 마치고 동상을 지나는 생도들은 ‘우로봐’를 외치며 존숭의 뜻을 전한다. 두 사람에게 사관생도 신조의 마지막 구절을 되돌려준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책임지라.
대전/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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