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1일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군민회관 앞에서 열린 ‘행정도시 사수 연기군민 대정부·한나라당 투쟁 선포식’에서 주민대표들이 세종시 설치법 제정을 촉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세종시 시대 개막] 백지화 위기서 행정도시 출범까지
잊혀지지 않는 2004년 10월21일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2004년 10월21일 한낮, 충남 연기군 남면은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텔레비전에 뜬 ‘위헌 결정’ 빨간 자막 한줄에 행정수도 예정지 주민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똑딱똑딱’ 괘종시계 추의 소리에 맞춰 심장이 따라 뛰었다.
“국회의원이 뭐하러 있는겨. 헌재가 언제부터 바른 소리 했다고 저런 결정을 내는겨?” 소주잔을 잡은 안원종(56) 연기군 남면신행정수도이전 주민대책위원장의 손과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연기·공주 지역은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수도이전 프로젝트인 백지계획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가 곧 백지화됐던 전례가 있다. 남면대책위는 즉각 행정수도사수 남면비상대책위원회로 조직을 전환하고 23일 첫 집회를 열었다. 6년 투쟁의 시작이었다. 25년 만에 찾아온 수도의 꿈은 원주민에게 가혹한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1·2차 투쟁-생존권을 향한 원주민들의 절규
“우리가 원했습니까? 수도가 온다고 해 고향 내놓고 빚내서 대토 샀는데 누구 마음대로 못하겠다는 겁니까?”
2004년 10월23일 행정수도사수 남면비상대책위원회가 연 첫번째 행정수도 사수 집회가 300여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종촌리에서 열렸다. 다음날인 24일 연기군 사수대책위원회가 꾸려지면서 집회는 매일 열렸다. 헌법재판관과 한나라당 허수아비도 매일 타올랐다.
주민 집회는 생존권 투쟁의 성격을 보였다. 행정수도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충청권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보상금을 받을 즈음이면 땅값이 더 오를 거라는 소문이 나자 원주민들은 보상에 앞서 대출받는 등 빚을 내 부여·논산의 논밭을 샀다. 2004년 9월말까지 행정수도 예정지 주변 농협의 대출 총액은 1100억원대에 달했다. 행정수도가 백지화되면 주민들은 대출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갚을 방법이 없었다.
“죽고 싶어유. 농사를 포기 못한 게 죄인가유?” 김아무개씨는 “7월에 부여에 평당 5만원하는 논 30마지기(약 1만8천㎡)를 사고 든든했는데 행정수도가 백지화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가슴을 쳤다.
당시 평당 2만~3만원 하던 땅은 반년새 5만~10만원까지 올랐고, 대토하는 농민들 사정을 아는 농협은 오른 값으로 땅을 평가해 대출해 줬다. 행정수도가 건설되지 않으면 땅값이 곤두박질치는 것은 정해진 이치여서 농민들은 전 재산을 날리고도 빚을 다 갚지 못할 처지에 몰렸던 셈이다.
무허가 건물에서 살던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도 보상받으려고 정화조를 설치하는 등 허가 요건을 갖추느라 없는 살림에 수백만원씩 빚을 얻었다.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을 대신한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3개월 뒤인 2005년 6월15일, 행정도시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수도분할반대 범국민운동본부 최상철 교수 등이 또다시 헌재에 행정도시건설 특별법 위헌 확인 소원을 낸 것이다. 원주민들은 다시 격분했다. 대전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같은 해 11월, 헌재는 위헌 확인 소원을 각하했다.
“뭔가 찜찜했어요. 좋으면서도 불길했다고 할까요.”
장병기 전 남면대책위원은 2006년 11월 행정도시 도시계획이 확정되면서 보상이 시작되고 원주민 생계조합이 꾸려져 직업전환 교육도 진행돼 이젠 제대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해 12월31일 투쟁의 중심이던 종촌리에서 남면 원주민들의 송년회 겸 마지막 집회가 열렸다. 주민들은 희망을 얘기했다. 2007년 행정도시 건설 기공식이 열려 행정도시 건설은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듯했다.
신행정수도지속추진 연기군대책위원회가 2005년 말 펴낸 ‘투쟁 백서’를 보면, 2004년 10월부터 행정도시건설특별법이 제정된 2005년 3월까지 5개월여 동안 연기를 비롯해 서울과 대전, 청주 등지에서 △집회(13회) △선전전(44회) △토론회(10회) △촛불집회(100회)가 잇따랐고, 참석한 연인원은 5만명을 웃돌았다.
3차 투쟁-거짓말 정권과 맞짱뜨다
2008년 2월 새 정권이 들어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세종시에 유치해 명품도시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여권에서 ‘행정도시는 자족성이 없어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정부는 세종시 예산을 반토막냈다. 국토 균형발전의 다른 한축이던 혁신도시는 꽤 축소되고 있었다. 7월10일 한나라당 정진석 의원이 행정도시 특위 재정비를 발표했다.
세번째 싸움은 대정부 투쟁이었다.
7월23일 투쟁 주력인 행정도시 사수 연기군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충남비상행동 등도 합류했다. 남면이 철거돼 주민 결속력이 전 같지 않았지만 연기군민과 공주, 충북 청원 주민들은 상경 투쟁을 하고, 곳곳에서 1인시위를 계속하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행정도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국책사업이지 충청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출범은 법을 지키지 않는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국민의 정당한 저항입니다.”
2009년 1월16일 연기군 사수대책위를 지원하기 위한 ‘수도권규제완화 철회와 행정도시 정상추진을 위한 범충청권협의회’ 출범식에서 이상선 상임대표는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고 공전하는 세종시설치법 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녹색복합도시’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종시 무력화 시도를 계속했다. 이에 충청민들은 3월26일 1만여명이 대전역에 모여 ‘행정도시 정상 추진 및 지방살리기 범국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9월초 행정도시 수정론자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에 내정되자 투쟁은 치열해졌다. 유한식 연기군수는 단식농성을 시작했고, 주민들도 릴레이 단식에 나섰다. 릴레이 단식은 148일 동안 계속됐다. 전국의 200여 시민사회단체가 원안 사수 투쟁에 동참했다.
정부는 2010년 새해 벽두부터 “세종시의 자족성을 높이려면 대기업이 입주해야 한다. 삼성 등에 토지 분양가의 6분의 1 가격에 원형지 개발권을 주겠다”고 밝혀 논란을 이어 갔다. 국정원이 수정안 홍보에 나섰다 들통나면서 투쟁의 불길도 다시 타올랐다.
“내가 삼성한테 고향 내준 게 아녀. 행정도시 안 할 거면 집과 땅 도루 다 내놔.”
1월22일 금남면 용포리 두진리버빌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이주 원주민들은 “고향이 그립다. 싸우기 전으로 돌아가 이웃들과 어울려 떡국과 막걸리 먹고 윷놀이 한판 벌이면 소원이 없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운찬 국무총리와 한나라당 의원들이 각각 행정도시건설청을 방문하던 날, 70대 이상 노인들은 손자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경찰기동대 버스 지붕에 올라가 계란을 던졌다. “이눔들아 물러가라. 거짓말하는 니들이 혈세 처먹는 정승, 판서냐?”
정권은 민심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해 6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어 12월8일 세종시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날 조치원역에서는 150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주민들은 2년6개월에 걸친 세번째 세종시 사수 투쟁의 승리를 선언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홍석하 전 행정도시사수 연기군대책위원회 사무처장은 “세종시가 제 기능을 다해 국민이 고루 잘사는 국토 균형발전을 이루는 것이 사수에 몸 던졌던 원주민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세종시/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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