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서 만난 청년들 정보요원 같았다” 장준하
“현장서 만난 청년들 정보요원 같았다”
“수십 길 절벽에서 떨어져 숨졌다는데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재야운동가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의 30주기를 이틀 앞둔 15일 당시 사건 현장에 수사기관 직원으로는 출동해 고인의 주검을 최초로 목격했던 경찰관 이수기(59)씨에게 정황, 인물, 의문점 등을 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57살이던 고인이 등반 중 실족해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유족과 재야는 ‘정치적 타살’이라는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이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위 1기와 2기에서 모두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받았으며 최근 국정원 과거사 진상 우선조사 대상에서도 빠져 있는 상황이다.
서거 30주기 앞두고 현장목격 정황 소상히 밝혀
“사고지점 등산로 아니었고 몸에 상처없어 의아
건장한 청년 3명이 ‘본 대로만 진술해’ 을렀다” 이씨는 당시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순경으로 근무하다 출동해 변사처리를 맡았다. 그는 75년 8월17일 경기도경에서 경비전화로 ‘장씨가 추락사 했다’는 연락을 받고 지서에서 4㎞쯤 떨어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입구로 갔다. 이 곳에서 장씨의 일행이라는 등산객의 안내를 받아 사고 지점인 절벽에 도착했다. “사고지점은 등산로가 아니었습니다. 장씨의 몸은 깨끗했죠. 물이 흘러 이끼가 낀 높이 14m 절벽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몸에 핏자국이나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귀 뒤에 점(검안 의사가 지적한 오른쪽 귀 뒷쪽 지름 2cm 가량의 함몰을 일컫는 것으로 보임)같은 것이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머리는 비스듬히 동쪽을, 다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에는 이미 의료진으로 보이는 군인 2~3명이 도착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동행자가 누군지 묻자 김아무개(장씨가 일행과 헤어져 약사봉으로 향할 때 혼자 뒤따라간 뒤 사고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인물)씨라고 대답했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되짚었다. 그는 이어 “본서에 보고하려고 현장에서 내려오다 점퍼를 입은 건장한 청년 3명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한명이 ‘본대로만 진술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기관 소속인지 모르지만 정보요원처럼 보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사건 뒤 석 달 만에 인근 백이지서로 근무지를 옮긴 이씨는 이듬해 고향인 전남지역으로 내려와 3년 전인 2002년 퇴직했다. 이씨는 사건 수사로 현장을 30여 번 오르내렸고, 26년만인 2001년 의문사위의 조사 때 안내를 맡은 뒤 모두 아홉 차례 출석해 현장 상황을 진술했다. “당시 사고 장소를 아무도 몰라 안내를 해야 했습니다. 현장에는 사고 한 달 뒤 백기완씨 등 지인들이 세운 비가 그대로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씨는 이어 “지서로 사고 신고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도경에서 먼저 알고 경비전화를 통해 연락을 해왔습니다”라며 장씨 집으로 일행이 연락한 내용을 도청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사건의 열쇠를 쥔 동행자 김씨에 대해 “정보기관 요원인지 포섭됐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며 “단지 의문사위 대질신문 때 김씨가 당시 현장에 있었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씨는 특히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에서도 밝혔지만 현장에 처음으로 출동했던 경찰관으로서 ‘추락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장 선생의 30주기 추모제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의 천주교 나자렛묘지에서 열린다. 고인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평양 숭실중과 일본 동양대를 졸업했고 44년 학도병에 입대했다 탈출해 중국군에 가담한 뒤 광복군에 편입됐다. 광복 뒤에는 <사상계>를 설립하고 저서 <돌베개> <민족주의자의 길> 등을 출판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사고지점 등산로 아니었고 몸에 상처없어 의아
건장한 청년 3명이 ‘본 대로만 진술해’ 을렀다” 이씨는 당시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순경으로 근무하다 출동해 변사처리를 맡았다. 그는 75년 8월17일 경기도경에서 경비전화로 ‘장씨가 추락사 했다’는 연락을 받고 지서에서 4㎞쯤 떨어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입구로 갔다. 이 곳에서 장씨의 일행이라는 등산객의 안내를 받아 사고 지점인 절벽에 도착했다. “사고지점은 등산로가 아니었습니다. 장씨의 몸은 깨끗했죠. 물이 흘러 이끼가 낀 높이 14m 절벽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몸에 핏자국이나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귀 뒤에 점(검안 의사가 지적한 오른쪽 귀 뒷쪽 지름 2cm 가량의 함몰을 일컫는 것으로 보임)같은 것이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머리는 비스듬히 동쪽을, 다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에는 이미 의료진으로 보이는 군인 2~3명이 도착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동행자가 누군지 묻자 김아무개(장씨가 일행과 헤어져 약사봉으로 향할 때 혼자 뒤따라간 뒤 사고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인물)씨라고 대답했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되짚었다. 그는 이어 “본서에 보고하려고 현장에서 내려오다 점퍼를 입은 건장한 청년 3명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한명이 ‘본대로만 진술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기관 소속인지 모르지만 정보요원처럼 보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사건 뒤 석 달 만에 인근 백이지서로 근무지를 옮긴 이씨는 이듬해 고향인 전남지역으로 내려와 3년 전인 2002년 퇴직했다. 이씨는 사건 수사로 현장을 30여 번 오르내렸고, 26년만인 2001년 의문사위의 조사 때 안내를 맡은 뒤 모두 아홉 차례 출석해 현장 상황을 진술했다. “당시 사고 장소를 아무도 몰라 안내를 해야 했습니다. 현장에는 사고 한 달 뒤 백기완씨 등 지인들이 세운 비가 그대로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씨는 이어 “지서로 사고 신고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도경에서 먼저 알고 경비전화를 통해 연락을 해왔습니다”라며 장씨 집으로 일행이 연락한 내용을 도청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사건의 열쇠를 쥔 동행자 김씨에 대해 “정보기관 요원인지 포섭됐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며 “단지 의문사위 대질신문 때 김씨가 당시 현장에 있었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씨는 특히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에서도 밝혔지만 현장에 처음으로 출동했던 경찰관으로서 ‘추락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장 선생의 30주기 추모제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의 천주교 나자렛묘지에서 열린다. 고인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평양 숭실중과 일본 동양대를 졸업했고 44년 학도병에 입대했다 탈출해 중국군에 가담한 뒤 광복군에 편입됐다. 광복 뒤에는 <사상계>를 설립하고 저서 <돌베개> <민족주의자의 길> 등을 출판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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