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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40년 명문 제과학교 벼랑끝 선 이유는

등록 2013-04-05 08:21

‘제빵사관학교’로 불리는 한국제과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위기를 맞고 있다.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제과학교 실습실에서 학생들이 단팥빵을 만들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제빵사관학교’로 불리는 한국제과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위기를 맞고 있다.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제과학교 실습실에서 학생들이 단팥빵을 만들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기업 빵집 탓에 동네빵집 줄자
재정후원 줄어 작년 3억여원 적자
서울시서도 지원 못받아 매각 진행
졸업생들 “법 고쳐서라도 뒷받침을”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에 있는 ‘류재은 베이커리’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북적댄다. 길게 줄을 늘어서서라도 맛봐야 하는 건 류재은(46)씨가 만든 마늘빵이다. 그만큼 맛소문이 자자하다.

류씨는 서울 성북구 삼선교에 있는 나폴레옹과자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폴레옹과자점을 만든 강인정 전 사장은 류씨에게 또다른 ‘아버지’나 다름없다. 27년 전 전북 남원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무작정 상경한 그를 받아줬다. 무엇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건, 한국제과학교다. 강 전 사장은 류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보고 ‘제빵사관학교’로 불리는 한국제과학교에 보내줬다. “체계적으로 빵 만드는 법을 배워보라”는 배려에 갓 스무살이 된 류씨는 제과제빵 자격증을 땄고 이후로 나폴레옹과자점과 리치몬드과자점 등 내로라하는 제과점에서 빵을 만들 수 있었다. “제과학교에서 좋은 선후배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죠.” 그는 2009년 독일 베이커리월드컵에서 동메달을, 2010년 미국 월드페이스트리챔피언십에서 베스트초콜릿상을 받았다.

한국제과학교는 1972년 문을 연 1년 과정의 고등기술학교다. 40여년의 세월 동안 류씨와 같은 70여명의 제과기능장과 1900여명의 제과기능공을 배출했다. 대체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배워 제빵사가 됐고, 한국 제빵시장을 이끌어 왔다.

이런 ‘제과사관학교’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최근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확산 탓에 그동안 이 학교에 재정 지원을 해오던 중소 빵집들이 무너지면서다. 40대 이상에겐 추억의 빵집인 뉴욕제과, 고려당, 태극당, 성심당 등 전국의 수많은 ‘동네빵집’들이 학교 운영비를 대왔지만, 이들이 폐업하거나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제과학교마저 존폐의 갈림길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최근 몇 해 동안은 위탁교육이나 평생교육을 통한 수입으로 어렵게 버텨왔다. 그러나 지난해 3억5000만원가량의 재정적자에 빠지면서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학생 수도 정원 50명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상황이다. 조성완 교장은 “지난 2년여 동안 지원을 받기 위해 서울시와 시교육청 등을 헤매고 다녔지만 ‘지원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정식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1년 과정의 기술학교인 탓에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관계기관의 설명이었다.

이곳 졸업생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 졸업생이자 2002년 한국인 최초로 베이커리월드컵에 출전한 김흥종(51)씨는 “학교의 도움을 받은 졸업생들이 학교를 다시 지원하려면 프랜차이즈 빵집과 싸워 이겨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법을 고쳐서라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득세로 제빵사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현실도 학교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재정난에 시달린 이 학교는 현재 매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이달 중순께 새 주인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학교와 함께 해법을 모색해온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은 “민간기업이 이를 인수해 애초 학교 설립 취지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40년 제과 명문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사회의 큰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위태로운 학교는 지난달 새 학기를 시작했다. 동네빵집이 하나둘 사라진 세상에서 ‘제빵왕’을 꿈꾸는 이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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