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냄새’ 시어 썼다고…‘피 흘리는 시민’ 그렸다고…
“문제 소지 작품엔 청장상 발급안돼”
사업회쪽에 이례적 사전 협의 요구
작년 ‘전두환 비판 작품’ 의식한 듯
“문제 소지 작품엔 청장상 발급안돼”
사업회쪽에 이례적 사전 협의 요구
작년 ‘전두환 비판 작품’ 의식한 듯
서울지방보훈청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초·중·고교생들의 글·그림·사진 공모전인 서울청소년대회에서 뽑힌 서울보훈청장상 수상작을 다른 작품으로 바꾸라고 주최 쪽인 ‘5·18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에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한 초등학생이 이 대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소재로 지은 시 ‘29만원 할아버지’로 서울보훈청장상을 받으면서 시 내용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이후 처음 열린 대회에서 보훈청이 기념사업회 쪽의 수상작 선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2일 국가보훈처와 기념사업회 쪽의 말을 종합하면, 서울보훈청은 이날 기념사업회 쪽이 선정한 제9회 대회의 서울보훈청장상 수상작 9편 가운데 2편을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기념사업회는 서울보훈청으로부터 ‘청장상 및 후원 명칭’ 사용 승인을 받아 학생들에게 상과 상품을 수여해왔다.
서울보훈청이 문제삼은 작품은 중학생의 시 1편과 초등학생의 그림 1점(사진)이다. ‘5월의 봄나무’라는 시는 5·18 정신을 봄나무에 빗댔다. 이 중학생은 시에서 “꽃향기가 물들던 봄날, 피 냄새를 풍기는 강한 봄바람, 묘지 앞에 있던 나무는 흔들리고 나뭇잎은 떨어져 나간다. 평온하고 고요한 봄날 총성으로 내리는 비, 나무는 비에 잠기고 나뭇잎들은 쓸쓸히 떠내려 간다”고 노래했다.
초등학생의 그림은 꽃이 떨어지는 배경에 한 계엄군이 총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래로는 5·18의 비극적 상황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탱크와 총을 앞세운 계엄군과 붉은 깃발을 든 시민군이 맞서는 모습이다. 참회자의 반성 속에 과거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보훈청은 시에 나오는 ‘피 냄새’와 ‘총성’이라는 시어를, 그림의 경우 군인이 쏜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민의 모습을 문제삼았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서울보훈청에서 해당 작품이 5·18 정신에 부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어 자문을 한 것일 뿐, 작품을 교체하라고 통보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서울보훈청이 수상작 선정에 개입한 적이 없었지만, 지난 3월5일 서울보훈청은 기념사업회에 ‘5·18기념 제9회 서울청소년대회 청장상 및 후원명칭 사용 승인’ 공문을 보내 “문제의 소지가 있을 때 청장상을 발급하지 않을 수 있다”며 수상작 관련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이는 지난해 서울보훈청장상으로 뽑힌 시 ‘29만원 할아버지’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의 한 초등학생이 쓴 이 시는 ‘29만원밖에 없다면서 큰 집에 사는 이유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 너무 끔찍한 사실들을 알게 됐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일침을 가해 화제가 됐다.
정경자 서울기념사업회 사업추진위원장은 “학생들의 작품도 예술행위인데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통해 결정한 작품을 행정의 잣대로 사전 검열하는 것은 유신이나 5공 시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지난해 논란이 된 ‘29만원 할아버지’ 작품을 의식한 처사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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