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여자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곱달 만이었다. 얼굴 보고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작은 기대를 품고 나간 자리였다. 여자친구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나 임신했어. 한달 뒤 출산이야.” 여자친구는 고개를 떨궜다. 충남 부여에 살던 이민준(가명·21)씨는 여자친구인 문서영(가명·20)씨와 지난 3월 다툼 끝에 헤어졌다. 임신 사실은 몰랐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도 둘은 아이 문제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아이를 낳고 함께 키우자”고 했고, 문씨는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다투고 난 뒤 돌아섰다.
10월31일, 문씨가 다시 그를 찾았다. 출산 이틀 만이었다. ‘아주 작은’ 아이가 품에 안겨 있었다. “3~4일만 맡아줘.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데리러 올게.” 하얀 천에 싸인 어린 생명은 눈을 감고 순하게 잠들어 있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날을 끝으로 문씨는 종적을 감췄다. 휴대전화도 끊겼고, 혼자 살고 있던 집에서도 이사를 가버렸다. 방도가 없었다. 이씨는 인터넷을 뒤져 분유를 타고 아이를 다뤄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11월17일 입대가 예정돼 있었다. 군 복무를 늦춰볼 생각으로 부양가족 등록을 위해 동 주민센터를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민센터에서는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올리려면 출생신고가 필요한데, 혼외자의 경우 생모가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자관계 입증 안된다고…‘혼인외 자녀’ 출생신고 아빠는 못해
아이를 맡길 만한 가족도 없었다. 이씨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길러준 외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었다. 입양도 어려웠다. 출생신고를 거치지 않고선 입양이 안 된다. 결국 이씨는 지난 4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베이비박스’를 찾았다. 이씨는 이 교회 이종락(59) 목사에게 “제대하고 준혁(가명)이를 꼭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곳은 미인가 시설이다. 아빠는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너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널 감당할 수 없어 아빠한테 맡긴 거야. 그런데 아빠는 지금 널 돌봐줄 여건과 형편이 안 된다. 법으로도 알아보고 했는데 미안하다. 이런 아빠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용서해다오. 아빠가 군대 갔다 오고 꼭 보자. 미안해.”
아동 유기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혼부·미혼모 가운데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대체로 미혼모에게 쏠리지만, 친모가 떠난 자리에서 아이를 홀로 보듬다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유기하는 미혼부들이 적지 않다. <한겨레> 취재진이 주사랑공동체교회에서 머문 10월31일부터 지난 19일까지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미혼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95년 2630명이었던 미혼부는 2010년 1만8118명으로 급증했다. 미혼부 역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이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는 점에서 미혼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군복무 문제까지 겹치면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사회문화적 변화와 미혼부에 대한 무관심도 이들의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 양재진 연세대 교수(사회과학부)는 “사회가 개인주의화하고 핵가족화하면서 과거와 달리 미혼부의 아이를 다른 가족이 떠안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다. 미혼모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미혼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그동안 미혼모에 한정돼 있던 임대주택 입주 혜택이 미혼부로 확대된 게 올해 초의 일이다.
대학생 김재성(가명·20)씨도 어떻게든 아이를 키워보려다 끝내 좌절한 경우다. 김씨는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대전에서 동거를 하다가 지난해 말 아이를 가졌다. 여자친구는 한달에 120만원가량을 벌었지만, 임신 뒤 일을 그만뒀다. 이후 김씨가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월 40만~50만원가량을 벌었다. 방값 35만원을 내고 나면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아이는 지난 9월에 태어났다. 분유는 힘겹게 먹였지만, 방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여자친구마저 사라졌다. 김씨는 집에서 아이만 보다가, 지난달 12일 베이비박스를 찾았다.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나이가 어려도 아빠는 아빠니까요. 낮에 아이를 어디에 맡길 수만 있다면, 그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을 텐데….”
법적으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상황도 걸림돌이 됐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예방접종도 못 했어요. 보험 적용 받으려면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데, 혼외자는 친모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고, 여자친구는 찾을 길이 없고….”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은 혼인 외 자녀의 출생신고 의무자를 ‘친모’로 규정해두고 있다. 친모가 할 수 없을 땐 다른 이도 신고할 수 있지만, 아이 아빠는 안 된다. 친모와 함께 사는 친족이나, 분만에 관여한 의사·조산사가 대리할 수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친모는 출산이라는 자연적 현상에 따라 모자관계가 입증되지만, 부자관계는 그렇지 않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아버지가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원에 ‘인지청구’를 하면 되는데, 이 경우도 아이가 출생신고가 돼 있어야 가능하다. 이씨나 김씨처럼 혼외 자녀를 낳고 친모가 도망간 상황에선 유전자 검사와 함께 친모가 아이를 두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법원에 증명해야 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미혼부(36)는 “시장에서 일하며 6개월 동안 아이를 홀로 키웠는데 출생신고가 안 된다고 한다. 사회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30만원을 들여 유전자 검사를 받고, 이를 근거로 법원에 소송을 낸 상태다.
전문가들은 제도의 결함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용 중앙대 교수(법학)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도 제시돼 있듯이 태어나자마자 출생등록을 하는 것은 아이의 권리다. 우리나라도 현행 출생신고제를 출생등록제로 바꿔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의무적으로 출생을 등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욱 김효진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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