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고답마을 노인들이 6일 저녁 경찰 숙소로 사용할 컨테이너박스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우고 있다. 밀양/장영식 사진가 제공
현장 르포
인도주의의사협, 주민 317명 조사
농성장 지키느라 급격히 쇠약
인도주의의사협, 주민 317명 조사
농성장 지키느라 급격히 쇠약
‘이렇게 더러운 놈들하고 계속 싸우느니 고마 내가 사라지고 말지.’
“딴딴한 밧줄을 손에 착착 감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산으로 올라가가 줄 매달 만한 나무를 찾아서 홱 줄을 던졌는데, 그때 누가 뒤에서 나를 붙잡아 살았다 아이가.”
경남 밀양 주민 정아무개(73)씨는 지난해 5월 말 겪은 일을 엊그제 일처럼 기억했다. 당시는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한국전력공사(한전) 직원, 경찰 등과 실랑이를 벌인 직후였다. “주민 농성장 천막 날아가라꼬 우리 밧줄을 풀어가가 자기네 햇볕 가리개용 천막 치는 데 쓴 걸 보니까 유치해서 화가 나나 안 나나.” 밧줄을 도로 가져오다 쌓여 있던 감정이 ‘울컥’하며 자살 시도까지 이어진 것이다. 8일에도 그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 127번 송전탑 건설 예정지 근처 농성장에 있었다.
“자살한 어르신 가족들 보니까네 안쓰라바서 그때 내가 죽었으믄 우리 가족들이 얼매나 힘들었겠노 싶어서 그라지 말아야겠다 싶데.” 그래도 정씨는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이 단순해진데이. ‘내가 죽으믄 송전탑 문제 잘되겠지’ 이 생각밖에 안 나는 기라. 순식간이다.”
밀양이 아프니 주민들도 아프다.
<한겨레> 취재진은 7일부터 이틀간 밀양시 단장·상동·부북면 주민 20여명을 만났다. 올해는 송전탑 반대 투쟁 10년째이고, 7일은 지난해 10월 공사 강행부터 100일째였다. “죽고 싶다”고 털어놓지 않는 주민들을 찾기 힘들었다. 밀양 주민들의 올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몰아치는 눈보라와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농성장을 비우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환경약자인 노인층의 피해가 크다. 노년에 큰 걱정거리를 안았다. 고혈압·당뇨 등을 앓으면서도 주기적으로 약을 먹거나 병원 진단을 받는 일조차 제대로 못해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골다공증을 앓아온 부북면 주민 손희경(79)씨는 지난해 1년여 동안 주사를 못 맞았다. 농성장에 지지방문 온 의사의 도움으로 최근 다시 병원을 찾은 손씨는 “엉망으로 상태가 악화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보고 ‘할매는 지금 넘어졌다카면 절단이라요’카대.” 그래도 손씨는 화악산 중턱 농성장에서 며칠씩 보초를 선다. “인제 내는 이대로 여기서 지내다가 공사 강제로 시작할라카면, 조짝에 들어가 거기 묻힐 끼다. ‘저 노인네는 끝까지 반대하다 저렇게 갔구나’라는 걸 남기면 됐다.” 손씨는 농성장 한편에 파놓은 구덩이를 가리켰다.
많은 주민들이, 잠을 못 이뤄서, 등짝이 아파서, 저절로 살이 떨려서 병원을 찾는다. 의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싸움을 관두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삶터를 포기하라’는 얘기처럼 들려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3~5일 밀양시 4개면(단장·산외·상동·부북면) 주민 317명을 대상으로 벌인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는 무척 충격적이다. 인의협이 9일 낸 ‘밀양 송전탑 건설지역 주민들의 건강권 침해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나는 기회만 있으면 자살하겠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주민들이 조사 대상자 317명 중 34명(10.7%)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자살을 떠올리는 걸 넘어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에 ‘나는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는 91명(28.7%)을 합치면 10명 중 4명꼴로 심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셈이다.
6일 경찰과 충돌이 벌어진 한 마을에서는 50대 남성이 “분신하겠다”며 휘발유를 들고 나왔다. 다른 주민 등이 말려 진정됐지만 긴장감은 여전하다. 주민들은 경찰 발자국 소리부터 한전 직원의 동선까지, 송전탑 공사와 관련한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팽팽한 긴장감은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스며 크고 작은 상흔을 남겼다.
주민들은 우울·불안감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인의협 보고서를 보면 주민 가운데 일반인 평균보다 높은 우울 증상을 보인 사람이 87.3%, 불안 증상을 보인 사람은 81.7%였다. 주민 김수암(72)씨는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경찰이 바글바글바글한다.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주민 김영자(58)씨는 “요즘 일어나면 베갯머리에 눈물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어 깜짝깜짝 놀란다. 자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밀양 주민들의 우울·불안 증상은 인의협이 지난해 6월 벌인 조사 때보다 2배 넘게 치솟았다. 조사 대상자가 지난해 79명에서 올해 317명으로 늘었는데도 아픔을 호소하는 주민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특히 우울감 호소율이 늘었다.
송전탑 건설 저지 과정에서 ‘한전·시공사·용역직원, 경찰 등에게 유무형의 학대나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71.9%가 ‘위협적이고 무례한 행동을 취해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뺨을 맞거나 발로 차이거나 주먹으로 맞았다’는 응답도 17.4%나 됐다.
이상윤 인의협 정책위원은 “당장 전문가의 정신심리적 개입이 필요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치료에 나선다 해도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 문제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밀양/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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