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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언론·검찰·법원과의 팀플레이를 기억하라

등록 2014-03-21 19:15수정 2014-03-24 16:19

[토요판] 한홍구의 간첩 이야기
② 조작의 스펙터클
조작 간첩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까?

간첩 수사에서 첫 단계는 ‘내사’다. 필자가 검토한 조작 간첩 사건들의 경우,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5년까지 본인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수사기관의 내사가 이루어졌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시절 필자가 조사하고 재심에서도 무죄가 난 사건은 모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내사에서 공개수사로 전환할 당시 장기간의 내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구체적 범죄의 단서나 혐의를 잡지 못한 것들이었다. 개그콘서트 유행어처럼 그저 “조사하면 다 나와”였다. 일단 피의자를 연행하여 ‘강력수사’를 하고, 가택수사를 해보면 구체적인 증거와 자백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 무작정 잡아다가 무작정 두들겨 팼다. 내사 기간이 오랠수록 내사 대상자가 간첩이라는 확신은 더 굳어지고, 장기간에 걸쳐 인력과 자원을 썼으니 반드시 그가 간첩임을 증명해주어야 한다.

“가보면 압니다.” 아마도 조작간첩이 마지막으로 들은 존댓말일 것이다. 차에 타면 반말과 욕에 머리를 후려쳐 창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영장의 제시나 미란다 원칙의 고지 같은 것은 간첩 사건에는 없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본인도 자신이 어디로 끌려와 있는지 몰랐다.

내란죄나 외환죄 같은 중대 범죄에도 없는 ‘특별소송규정’이란 것이 국가보안법에는 적용된다.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경찰에서 10일, 검찰에서 20일 동안 수사가 가능한데, 국가보안법 사건은 경찰이나 안기부에서 20일, 검찰에서 30일 등 무려 50일간 ‘합법적’으로 구금할 수 있다. 이렇게 긴 기간 조사를 받았음에도 간첩 사건 중에 이 기간 안에 끝난 경우는 없다. 안기부에서 짧으면 40일, 보통 두 달은 기본이고 송씨 일가 사건의 경우 최장 118일까지 변호사나 가족과의 접촉을 차단당한 채 불법 구금되었다. 이것을 저들은 ‘관행’이라 부른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년까지
본인 전혀 모르는 채 ‘내사’
장기 내사에도 혐의 못 잡으면
가택 뒤져 뭔가 있으리라 기대
무작정 잡아다 무작정 두들겨패

볼펜 한 자루 쓰기 시작해서
잉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써본 경험이 얼마나 될까
조작 간첩들은 앉은자리에서
볼펜 한 다스는 기본이었다

“난수표 언제 찢었어?”는 차라리 고마운 질문

검찰이나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 절감하겠지만 하루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그런데 보통 두 달 동안 도대체 무얼 하고 지내는 것일까. 그동안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문당하고 엄청나게 진술서를 써댄다.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 “김일성 몇 번 만났어?”나 “이북 몇 번 갔다 왔어?” 같은 터무니없는 질문에도 무조건 답하다 보면 “난수표 언제 찢어버렸어?” 같은 질문은 안도감이 들 만큼 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들이 어떤 고문을 얼마나 당했는지는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1993년 12월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김삼석, 김은주 남매가 안기부에서 고초를 당할 때 당시 내무부 장관 최형우는 사상 문제로 잡혀 온 사람은 고문해도 괜찮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최형우는 김영삼의 오른팔로 오랫동안 나름 민주화운동을 해온 정치인인 동시에, 유신 직후 자신이 계엄당국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당한 고문피해자이기도 했다.

간첩으로 몰려 붙잡혀 오면 태어나서부터 잡혀올 때까지 모든 사실,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을 쓰고 또 써야 한다. 법정에 제출한 자술서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쓰고 또 써댄 자술서 분량이 웬만한 사람은 아마 허리 높이까지는 왔을 것이다. 일반인이 볼펜 한 자루 쓰기 시작해서 잉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써본 경험이 얼마나 될까. 쓰다 보면 어디론가 없어졌고, 또 내 주머니에 누구 것인지 모를 볼펜이 들어와 있는 법인데 간첩들은 앉은자리에서 볼펜 한 다스 정도 쓰는 것은 기본이다.

간첩은 원래 증거가 없다. 간첩 잡는 보안사령부의 수장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한 전두환의 신념이다. 어디 그뿐이랴. 유우성은 간첩은 맞지만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국가정보원(국정원)에 이르기까지 간첩은 증거가 없어도 된다는 믿음은 널리 퍼져 있다. 간첩 사건에서 무전기, 난수표, 권총, 독침, 암호문 같은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면 관련자를 지나치게 부풀렸다든가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나 불법 구금이 있었는가는 논란이 될지 몰라도 사건 자체의 조작 의혹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1970년대와 80년대의 간첩 사건 중에는 위에 열거한 확실한 증거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1982년 안기부가 수사한 황용윤 사건의 경우, 수사기록에 아예 증거물 목록이 첨부되어 있지 않다. 안기부 내부 자료에도 이 사건이나 이 사건에서 파생된 정영 사건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물증이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자백밖에는 증거가 없는데, 만약 피의자들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할 경우 방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 북에서 보낸 공작금을 보관했다는 무당 옷 같은 게 증거가 되어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떨어졌다.

70~80년대 간첩 사건이 발표되면 신문에는 간첩들로부터 압수한 증거물이라며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은 사진이 크게 실리곤 했다. 그런데 정작 사건 기록에 첨부된 증거물 목록과 사진을 비교해 보면 사진에 있는 무전기나 암호표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안기부 ‘소품실’에 있는 재고품이 우정출연한 것이다.

조작간첩 사건에서 증거보다 더 기가 막힌 건 간첩들이 팔아먹었다는 국가기밀, 군사기밀의 내용이다. 독자 여러분은 국가기밀을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부분의 독자가 국가기밀 근처에도 못 갔다고 할 것이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1997년 헌법재판소가 ‘비공지성’(非公知性)과 ‘실질비성’(實質秘性)을 갖추어야 국가기밀이라고 국가기밀의 범위를 엄격하게 해석하는 훈령을 내놓을 때까지 여러분은 걸어 다니는 국가기밀 덩어리였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국가기밀이 될 수 있었다. 신문에 난 공지의 사실일지라도 국가기밀이다 보니,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고 자장면은 싸고 맛있다는 것도 국가기밀이 되었다. 군대라고는 육해공군만 알았던 아주머니가 모임에서 만나 예비역 해병 장성에게 “아저씨, 해병대는 뭐 하는 데예요?” 하고 물었던 것도 해병대의 성격과 임무에 관한 군사기밀을 수집·탐지한 것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간첩이 줄어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주화 이후 법원이 국가기밀의 성격을 엄격히 해석함으로써 공안세력의 ‘간첩영업’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간첩을 적발했다는 발표는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과시하는 것이기에 아주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3년 이하의 징역을 처할 수 있는 ‘피의사실 공표죄’ 같은 것은 간첩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학생 데모가 한창일 때 발표된 송씨 일가 사건의 보도 내용을 보면 간첩들이 각 대학에 재학 중인 자녀들까지 간첩조직에 끌어들여 학원 동향을 수집 보고해 왔으며 학생과 근로자 등의 대정부 투쟁을 선동했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은 공소장은 물론, 신문조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영사증명은 애초에 ‘찌라시’일 뿐

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재일동포 사건이나 일본 관련 사건에서는 증거의 왕 자백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간첩조작의 만능열쇠가 하나 더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영사증명’이 바로 그것이다. 영사증명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이재승 교수(<국가범죄>, 2010, 앨피)가 지적한 것처럼 영사증명은 증명되어야 할 사실을 증명된 것처럼 꾸민 ‘찌라시’일 뿐이다. 간첩 사건에 제출된 영사증명은 영사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는, 아니 원천적으로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행위는 접수국의 주권 또는 관할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시절 내가 조사한 차풍길 사건은 영사증명이 어떻게 날조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안기부는 일본에 취업한 차풍길을 고용한 사장을 조총련에서 활동하던 제주도 출신 재일조선인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일본에 파견되어 있는 안기부 영사가 주변을 탐문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확인하고 일본 공안당국에 문의해보아도 틀림없는 일본인이었다. 일본 파견관은 이런 사실을 본부에 보고했으나, 본부에서는 전문을 보내 “첨부확인서 내용과 같이 영사증명을 작성 송부”할 것을 지시했다. 그 내용은 안기부 영사가 파악해 본부에 보낸 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인 사장이 조총련 간부라는 것이었다.

1987년 2월, 재일동포 심한식 간첩 사건에서 김헌무 판사는 영사증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2006년의 일심회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국정원 영사가 작성한 영사증명서의 증거능력을 배척했다. 그럼에도 일편단심 영사증명에 의존한 것은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오로지 북한간첩을 만들어내야만 국가안보, 아니 철밥통 안보를 지킬 수 있는 국정원이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마리의 간첩이 나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들의 팀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단 중앙정보부, 안기부만이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받쳐주고, 검찰이 법률적으로 포장해주고, 판사가 고문당했다는 호소에도 바짓가랑이 들어보라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조작의 한 부분을 맡아 팀플레이를 해가며 간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70년대 이후 적발된 간첩들 중에서 현재의 국가기밀 개념을 적용한다면 간첩죄로 유죄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첩은 처음에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모르는 놈을 “저 자식 간첩 아냐”라고 손가락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첩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간첩보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관련영상] [#9.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여간첩 원정화 사건, 공소장이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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