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의 '세월호']
(2) 다중이용 시설
‘소방 관리 우수’ 극장도 방화셔터 내릴 자리에 물건 쌓아둬
(2) 다중이용 시설
‘소방 관리 우수’ 극장도 방화셔터 내릴 자리에 물건 쌓아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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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트·백화점 등 13곳 조사
비상구 앞 카트·상품 어지러이
고객들도 “비상구가 있었나요?”
비상구(대피로)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화재나 건물 붕괴 등 각종 사고가 났을 때 건물 밖으로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설치한 피난시설이다.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지만 대피로에 대한 인식도 낮고, 정확한 안내도 없는 상황이다. 보통 시민들은 피난 때 이동할 방향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을 꼽았다. 대형마트 고객들은 차를 주차해 놓은 지하 3~5층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고객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백화점·복합쇼핑몰 이용객들은 에스컬레이터로 뛰어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겠다고 했다. 이영주 교수는 “자신이 지나온 길이 가장 익숙하겠지만, 화재가 났을 때 그 길을 되짚어 갔다가는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화재 때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것은 대피와 구조에서 멀어질 뿐이다. 에스컬레이터 역시 건물 상층부와 하층부를 연결하는 공간구조 탓에 화재 때 유독가스와 연기가 몰려 ‘굴뚝’으로 변한다. 화재 때 나는 유독가스에 3분가량 노출되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만큼 비상구가 중요하지만, 다중이용시설 대부분은 이에 대한 안내가 없거나 있더라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겨레>가 찾아간 은평구, 마포구, 영등포구 등의 대형마트에는 비상구 표시 없이 ‘정육코너’, ‘과일코너’ 등만 눈에 띄는 매장 안내도가 전부였다. 비상구를 찾아봐도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 진열대에 가려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중구, 서대문구 등에 위치한 유명 백화점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피난 대피로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비상구도 매장 안에 설치된 카페 등을 거쳐서 들어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매회 영화 상영에 앞서 비상시 대피 안내 영상을 보여주는 복합상영관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다만, 대기업 씨제이(CJ)가 운영하는 대형 복합상영관 씨지브이(CGV)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피난 안내도를 관객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아니라 캄캄한 상영관 문 안쪽 면에만 붙여놔 영화를 보기 전에는 대피로를 확인할 수 없었고, 상영관 안에서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비상구 관리도 엉망이었다. 대부분의 대형마트는 방범 및 관리상의 이유를 들어 비상구를 잠가놓고 있었다. 소방법(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은 피난시설을 폐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 관계자는 “평상시엔 잠겨 있지만 화재가 나면 자동으로 열리게 설비가 돼 있어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영주 교수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관용적으로 비상구 자동개폐장치가 허용되고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적법하지 않다”며 “화재가 아닌 다른 비상 대피 상황이 발생한다면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열리지 않고 수동으로 일일이 해제해야 하기 때문에 위급 상황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상구 앞에 물건을 쌓아둔 곳도 여럿 발견됐다.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공덕 이마트 비상구 앞에는 카트와 상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소방법은 비상구를 잠그는 것뿐만 아니라 피난시설이나 방화시설 주위에 물건을 쌓아놓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긴급한 상황에선 대피를 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대형마트는 소화기 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비상대피 계단에 놓인 소화기들을 확인해보니, 지난해 4월 이후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점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촌 현대백화점도 비상구와 방화문 앞에 물건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비상통로마다 “계단 등 피난 동선에 적재하는 것을 금지합니다”라는 내용의 ‘소방 장애물 제거 안내’를 붙여놓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영등포 씨지브이도 비상구로 향하는 길목에 플라스틱 상자와 종이 상자, 대형 수레 등이 놓여 있었다. 복합상영관과 쇼핑몰이 함께 들어서 있는 명동의 대형 쇼핑몰 ‘눈(NOON) 스퀘어’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비상구를 청소노동자 휴식공간으로 쓰는가 하면, 매장 창고로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대피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마트 등 열어야 할 비상구는 잠그고
닫아둬야 할 방화문은 열어놔
방화셔터 구역에 부츠매장 설치도
화재땐 연기확산 못 막고 탈출 못해
“불시점검 늘리고 벌칙 강화해야”
항상 닫혀 있어야 할 방화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곳도 많았다. 방화문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유독가스와 연기가 대피로인 비상계단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준다. 방화문을 항상 닫아둬야 하는 이유다. 신촌 현대백화점의 경우, 곳곳에서 열려 있는 방화문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방화문에 설치돼 있어야 하는 자동닫힘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한번 열면 저절로 닫히지 않는 방화문도 수두룩했다. 명동 롯데백화점도 방화문을 열어놓고 있는 층이 있었다. 신촌 씨지브이는 방화문이 닫히지 않도록 플라스틱 상자 6개를 쌓아올려 문틈 사이에 끼워둔 모습도 보였다. 모두 불법이다. 방화셔터가 내려오는 곳에 장애물을 둔 곳도 많았다.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20만명이 넘는 영등포구의 초대형 복합쇼핑몰인 ‘타임스퀘어’는 방화셔터 구역에 임시 부츠 매장을 설치해 두고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 방화셔터가 정상적으로 내려올 수 없는 구조로 초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높았다. 타임스퀘어 일부 매장의 천장 아래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열을 감지하는 집열판이 없어 불이 나더라도 초기에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소방안전관리 우수업체’로 지정한 서대문 메가박스도 다르지 않았다. 방화셔터가 내려오는 곳에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 데 쓰는 벨트차단봉과 의자들을 두고 있어, 우수업체라는 평가를 무색하게 했다. 다중이용시설들의 부실한 안전관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행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태환 용인대 특수재난연구소 교수는 “현재 소방법 등은 안전을 건물주 자율에 맡겨놓은 부분이 크고 소방점검도 불시가 아닌 통보제로 운영되고 있다”며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드러나듯 안전은 ‘자율’이 아니라 ‘책임’이 강화돼야 하는 만큼 소방·가스·설비 등 합동 불시 점검을 늘리고 과태료 300만~500만원 수준의 느슨한 벌칙 조항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과)는 “현재 우리나라는 화재나 사고 위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기능적으로만 건물 용도를 분류해 내화 및 안전시설을 설비하다보니, 비상구를 폐쇄하거나 창고로 쓰는 일 등이 발생한다”며 “이용객 수나 화재 위험 등 방재 특성을 고려한 건축물 용도 구분이 필요하고 안전기준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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