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폭행·협박 없었다” 원심 확정
성추행-성희롱 사이 처벌 사각지대
전문가 “입법 통해 처벌규정 마련을”
성추행-성희롱 사이 처벌 사각지대
전문가 “입법 통해 처벌규정 마련을”
남자 사장이 속옷 차림으로 여성 직원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시키고 “더 위, 다른 곳도 주무르라”고 요구했는데, 대법원은 이런 행위를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직장에서는 지위관계 때문에 상사가 물리력을 쓰지 않아도 심리적 위축을 느껴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유형의 성추행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자동차 대출 관련 업체를 운영하는 조아무개(41)씨는 2013년 8월 ㄱ(27)씨가 입사하자 교육을 하겠다며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손님이 올 수 있으니 문을 잠그라고 하고는 덥다며 반바지로 갈아입어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트렁크팬티만 입은 채 앉았다. 조씨는 업무 교육을 한 뒤 “고스톱을 쳐서 이긴 사람 소원을 들어주자”며 ㄱ씨를 옆에 앉혔다. 첫 판은 ㄱ씨가 이겼고, 조씨는 ㄱ씨 요구에 따라 커피를 사줬다.
두번째 판에서 이긴 조씨는 탁자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다리를 주무르라”고 시켰다. 종아리를 주무르자 한쪽 다리를 ㄱ씨 허벅지 위에 올리고는 “더 위로, 더 위로, 다리 말고 다른 곳을 주물러라”라고 시켰다. ㄱ씨는 허리를 숙이고 양쪽 다리를 주물렀는데, 속옷 안 ‘주요 부위’까지 보였다고 한다.
1심은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치료 강의 80시간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다른 사람을 추행한 경우 처벌하는 것인데, 비록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행위일지는 몰라도 폭행 또는 협박은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직원의 몸을 직접 만지려고 하지 않았고, 게임을 하다 벌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 강제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ㄱ씨는 경찰 조사에서 “조씨가 사장인데다, 내기를 해서 무조건 들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다리를 주무르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그 정도로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봤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도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2일 밝혔다.
현행법은 위력·협박·폭행 등 강제력이 동원된 성추행은 형사처벌하고, 상대적으로 정도가 약한 직장 내 성희롱은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강연재 변호사는 “형사처벌과 과태료 부과 사이의 중간지대에 있을 법한 유형의 성추행은 결국 처벌 규정 미비로 무죄가 될 수도 있다. 입법으로 처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수창 대전지검 천안지청 검사는 지난해 9월 ‘성희롱 행위에 대한 형사법적 규제’라는 논문에서 ‘위계·위력’이 사용되지 않아도 △불필요하게 이성의 신체를 접촉하거나 만지는 행위 △안마나 애무를 강요하는 행위 등 11가지 행위를 형사처벌할 수 있게 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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