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줍는 노인
지자체 복지사업 정비 방안에 ‘반기’…“지역에 맡겨야”
“기초연금 때문에 장수수당은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국내 노인빈곤율을 고려하면 기초연금은 최소 보장 수준이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니 지방정부가 자체 재원으로 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역의 자체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12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방자치단체(지자체) 사회보장사업 정비방안 규탄 국민공청회’에서 강세훈 대한노인회 행정부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 재원에 부담이 된다며 노인 기준 연령을 65살에서 70살로 높이자고 했던 대한노인회가 정부의 사회보장사업 정비 방침에 대해선 ‘반기’를 든 셈이다. 정부는 지자체가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장수수당을 기초연금과 ‘중복급여’로 판단해 강하게 폐지를 권고하고 있어, 당분간 유사·중복 복지사업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강 부총장 말고도 이날 국회엔 ‘복지재정 효율화’를 이유로 정부가 추진하는 ‘지자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리’ 움직임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 공청회는 지난 8월 국무조정실이 사회보장기본법을 근거로 중앙정부와 지자체간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목록을 발표한 뒤 사업을 통·폐합하거나 효율화하라는 지침을 각 시도에 내려보낸 데 따른 대응으로 열렸다. 정비 대상은 지자체 전체 사회보장사업 5891개 가운데 1496개(25.4%)로 4개 중 1개꼴이다. 예산 규모는 9997억원으로 1조원에 육박한다. 생활지원·보육·의료·교육 등 모든 복지 분야를 망라한다. 이에 저소득층·장애인·노인 등 ‘직격탄’을 맞게 된 취약계층이 나서서 정부의 사회보장사업 정비 방안을 규탄하러 나온 것이다.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지자체로부터 처우개선비를 지원받는 보육교사들은 실질적인 월급 삭감 위기에 처했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박미수 인천보육교사협회장은 “정부 어린이집 지원사업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정비 대상에 올라 최근 인천시는 보육교사 처우개선비를 201억원 삭감했다”며 “정부가 보육교사의 근로기준법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지자체 처우개선비 지원을 유사·중복 사업이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지자체의 처우개선비는 보통 월 3만~10만원 수준이다.
장애계에서는 중증 장애인들의 식사·이동 등 일상생활을 돕는 ‘장애인 활동보조’ 시간을 추가 지원하는 것까지 유사·중복 사업으로 분류하자 반발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혼자서 거동이나 식사가 불가능한 최중증장애인 대상 하루 활동보조 24시간 제공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건 사항이기도 했는데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이건 유사·중복이 아니라 보충적 성격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중앙정부 제공 기준 시간으로 최중증장애인이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약 13시간 정도다.
이런 유사·중복 사업에 대한 정비 방침에 지자체와 취약계층이 반발하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선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당초 사회보장위원회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지원’이라며 163개 지방정부의 ‘저소득층 건강보험료 지원’과 ‘기초연금과 같은 성격의 장수수당’ 폐지를 권고한다고 했지만, 저소득층의 건보료 지원을 추가 지원하는 것까지 없애려 한다는 비판(<한겨레> 9월10일치 10면)이 나오자, 이날 저소득층 건보료 지원은 지자체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다만 장수수당은 그대로 지자체에 폐지를 권고한다고 했다.
이날 국회 정문 앞에서 전국의 시민·복지단체, 장애·복지 시설 등 72개 단체가 모인 ‘전국복지수호공동대책위원회’는 발족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자치입법과 지방의회를 통한 자체 예산 편성이라는 민주 절차를 통해 시행하는 복지사업을 정부 위원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삭감 또는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반민주적”이라며 “정부의 사회보장사업 정비방안을 반드시 철회시키겠다”고 밝혔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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