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이 지난 12월29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수저게임’을 하며 ‘흙수저’ 카드를 뽑은 뒤 웃고 있다. 사진·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최서윤씨 제공
“아무리 ‘노오력’해도 각자 물고 태어난 ‘금수저·흙수저’를 벗어날 수 없다?” 최서윤 <월간잉여> 편집장이 “이러한 자조를 넘어 활발한 정치 토론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면 한다”며 지난해 말 이른바 ‘수저 계급론’을 빗댄 보드게임(게임판과 말·카드 등으로 진행하는 게임)인 ‘수저게임’을 내놓았다. <한겨레>는 세밑을 앞둔 지난 12월29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최 편집장과 김선기 전 <고함20> 편집장,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 박극렬씨, 손아람 소설가, 이승한 티브이(TV)칼럼니스트,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연구소장 등 ‘2030세대’를 고민하는 이들과 둘러앉아 수저게임을 함께 체험했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환생’한 참가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수저론’과 ‘민주주의’를 고민하며 카드패를 만지작거렸다.
최서윤 ‘월간잉여’ 편집장이 고안 법안 발의·랜덤카드 등 통해 계층 이익·삶의 변화 가상 체험
“으아악, 금수저야!”
판이 깔리고 가장 먼저 금수저·흙수저를 정하는 카드를 뒤집은 조성주 소장이 기쁨 반, 놀라움 반이 섞인 듯 ‘포효’했다. 곧이어 ‘흙수저’ 카드를 뽑은 대다수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패가 모두 돌자, 정의당의 조 소장과 <한겨레> 기자가 금수저를 물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 박극렬씨가 수저게임에서 사용하는 ‘랜덤카드’를 뽑는 모습. 사진·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최서윤씨 제공
현실을 빗댄 수저게임에서 참가자 가운데 단 2명만 금수저로 살 수 있다.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된 참가자들은 대학과 취업을 결정한다. 대학에 가면 등록금 부담이 있고, 취업을 하면 곧장 돈을 벌지만 대졸자보다는 임금이 적다. 참가자들은 돌아가며 각자 ‘계급 이익’에 맞는 법안을 발의한다. 법안 통과는 다수결로 정한다. 수가 많은 흙수저들을 위한 법률이 통과되기 쉽지만, 그 대신 금수저는 흙수저보다 더 많은 자산(집과 칩)을 갖고 시작한다. 금수저가 임대료로 앉아서 돈을 벌 때, 흙수저는 집 없는 설움을 떠안는다. 오랫동안 집을 갖지 못하면 ‘질병’과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성실하게 부를 쌓거나, ‘로또 당첨’ 또는 ‘탈조선’ 등 ‘랜덤카드’를 뽑아 인생 역전을 노려볼 수도 있다. 규칙이 복잡해 보이지만, 게임의 승리 요건은 간단하고 냉혹하다. 금수저는 자산을 조금이라도 불려야 하며, 흙수저는 끝까지 살아남으면 된다.
게임 초반, 흙수저들은 앞다퉈 궁핍한 삶을 낫게 하려는 법안을 내놓았다. ‘로스쿨 설립’ 안을 내놓은 박씨는 “취업 시기는 늦춰지지만 대졸자 취직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며 다른 흙수저들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법률 소비자들한텐 어떤 이익이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자 “로스쿨을 나오면 흙수저들한테 유리한 법안을 내도록 명시하겠다”고 했다. 금수저 조 소장이 “금수저 법안 만들 때마다 칩 하나씩 드리겠다. 고용된 변호사가 더 안정되지 않겠느냐”고 박씨를 회유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흙수저 다수의 지지로 법안이 통과됐다.
생존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한 채 결혼에 나선 흙수저도 있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는 이날 처음 본 <한겨레> 기자에게 대뜸 청혼을 했다. “대학 졸업하면 자산이 말라 사망할 것 같아요. 5 대 2로 투표권이 흙수저한테 몰려 있으니, 저랑 결혼한다면 저의 모든 의결권을 위임하겠습니다.” 생존을 위한 흙수저와 자산을 지키려는 금수저의 만남이었다.
곧이어 ‘반값등록금’ 도입 등 흙수저의 삶에 볕이 드는 듯했지만, 누군가 뽑은 랜덤카드를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벌어졌다. 임대료가 폭등했고, 대학에 가기로 했던 흙수저 김선기씨는 진학을 포기했다. 흙수저들이 동요하자, 손아람 작가가 ‘공공주택’ 법안을 발의해 흙수저들의 질병과 추가 임대료 지출까지 막았다.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금수저들의 비아냥이 잇따랐다. 그러나 다수결로 법안이 통과되자 파산 직전인 임경지 위원장이 신이 나 외쳤다. “손 작가님을 대통령으로!”
게임이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집을 마련한 흙수저들은 여유를 찾았다. ‘금수저 옥죄기’에도 나섰다. 임대소득에 세금이 붙었고, 전무후무한 ‘재산피크제’ 제도가 도입됐다. 상대적으로 소수자인 커플을 겨냥한 ‘커플 재산 몰수’ 법안까지 통과됐다. “이거, 위헌 아닌가요?” 금수저-흙수저 커플은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로 흙수저가 모두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갇힌다”는 랜덤카드의 등장으로 다시 금수저가 유리한 고지를 장악했다. 모든 재산을 몰수하려던 두 금수저는 아량을 베풀어 ‘게임 초기화’를 선택했다. 잠시나마 은수저를 경험한 다수의 흙수저들이 ‘일장춘몽’을 맛본 것으로 게임은 마무리됐다.
유쾌한 풍자가 담긴 게임의 여운도 길었다. “금수저를 해보니까 금수저한테 민주주의가 불편하다는 걸 느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그래도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게 한다.”(조성주) “그래도 현실에서 투표는 보수 표가 우위에 있다. 게임에선 ‘이데올로기 조작’이 없으니 흙수저 표가 정직하게 결과로 나온다.”(손아람) “게임에선 서로의 재산이나 계급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이 없어서 협상과 타협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비대칭성이 크다.”(임경지) “사실 흙수저한테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것도 이상하다. 현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씁쓸하다.”(박극렬) 소규모 서점 ‘퇴근길책한잔’ ‘유어마인드’에서 수저게임 판매에 나서기로 한 최 편집장은 “특히 중·고등학생들도 직접 게임을 해보면서 정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수지 고한솔 기자 suji@hani.co.kr ■ 금수저·흙수저 수저게임 영상 <한겨레티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