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이 모인 12일 서울 촛불집회는 공식적으로 ‘3차 범국민대회’ 또는 ‘민중총궐기대회’로 불렸지만, 축제 같은 분위기 덕택에 ‘서울하야페스티벌’(서하페)이라는 비공식 애칭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남긴 수많은 어록과 행동은 페스티벌 참가자들의 즐거운 ‘떡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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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서하페’…인증샷 ‘찰칵’하다가 “하야하라” 12일 주최 쪽 추산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이 모인 서울 광화문 일대엔 낮부터 기묘한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이디엠(EDM·일렉트로닉 댄스음악) 트럭에서 디제이가 음악을 틀면 모인 사람들이 마치 야외 클럽처럼 춤을 췄다. 대학생들은 닭 모형을 머리에 쓴 채 오방낭을 몸에 감고 행진하기도 했다. 이들은 새롭게 ‘민중가요’로 등극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함께 부르고, 10cm의 ‘아메리카노’를 ‘하야리카노’로 제목을 바꾸고 개사해 불렀다. 광화문광장 한복판엔 ‘고퀄리티’로 만들어진 단두대가 설치됐다.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대형 상여는 촛불 물결 사이를 갈랐다.
각종 단체에서 나눠준 ‘박근혜 퇴진’, ‘나가라 박근혜’ 등 손팻말이나 촛불을 들고 돗자리와 ‘셀카봉’을 챙겨와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날 저녁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 무대에 가수 조피디(PD)와 정태춘, 이승환 등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달궈졌다. 이승환의 히트곡 ‘덩크슛’의 ‘야발라바히기야’라는 가사를 ‘하야하라 박근혜’로 바뀌었고 광화문광장에 ‘떼창’(다 함께 부름)이 울려 퍼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가’가 돼 영상을 보던 사람들을 키득거리게 했다. 공연 사이사이 무대 사회자가 “박근혜는 하야하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라는 구호를 외치자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촛불을 들고 따라 외쳤고, 이 소리는 빌딩 숲 속에서 메아리쳤다. 이날 처음 집회에 나왔다는 대학생 박주희(24)씨는 “국민을 무시하는 대통령의 행태에 화가 난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아 역사적 순간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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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박근 위험혜 하야...순시려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이름, ‘어록’을 활용한 재치있는 손팻말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불박근 위험혜 하야...순시려’라고 적힌 대형 팻말은 박 대통령과 최씨의 이름을 절묘하게 접목해 ‘하야’를 촉구했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나온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는 최대 유행어였다. ‘이러려고 투표했나, 세금 냈나, 국민 됐나, 공부했나, 16년 살았나’ 등으로 변주됐다. ‘지지율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탓해’라며 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을 그린 팻말은 ‘운도 실력’이라던 정유라씨의 ‘어록’을 비튼 블랙 유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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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기관사들 “대한민국을 위해 힘써주십시오” 서울 시청역, 광화문역, 경복궁역은 집회 참석 인파로 마비됐다. 지하철 5호선 기관사는 “촛불로 켜져 있는 광화문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분들은 몸조심하시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안내 방송했고, 지하철 3호선에서도 한 기관사가 “오늘 집회에 참여하신 시민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신 시민분들을 목적지까지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방송해 열차 안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서울 중구 세종로파출소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했다. ‘하야하라’는 스티커를 몸에 붙인 채, ‘퇴진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민들이 파출소 안에 줄을 선 풍경도 이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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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혼술에 이어 집회도 ‘나 혼자’ 혼밥과 혼술이 유행인 시대, 집회 참석도 ‘나 홀로’인 ‘혼참족’들도 눈에 띄었다. 페이스북엔 집회 혼자 가는 사람들을 위한 페이지 ‘혼자 온 사람들’이 만들어졌다. 이날 ‘혼자 온 사람들’의 깃발 아래 모인 혼참족들은 40여명이었다. 이날 처음 만난 이들은 깃발 아래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졌다. 이원상(30)씨는 “친구들은 가정이 있고 바쁘니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혼자 오기는 서먹할 것 같아 페이스북 모임을 찾아 왔는데 집회 참여하다가 일이 있으면 자유롭게 들고 나면서 자유롭게 움직여서 좋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는 허동연(32)씨는 “일본 사람들이 자꾸 물어봐 창피해서 살 수가 없어서 집회 참석을 위해 30만원을 들여 한국에 왔다”며 “같이 갈 사람 찾으려니 후배들은 이미 지난주에 다녀왔다고 해서 이들과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수지 박수진 고한솔 기자
suj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