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3차 범국민대회’가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서울광장의 모습.
12일 서울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 다른 지역 6만여명의 촛불이 켜졌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서울지역 최대 70만명을 훌쩍 넘긴 인원으로, 1987년 6월항쟁 당시 7월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모였던 100만 인파 이후 29년 만에 최대다. 30년 전이 직선제로 상징되는 정치 민주화 요구였다면, 시민들은 이제 자신의 삶에 닿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넘쳤다.
광화문에서부터 서울시청 너머까지 청와대 앞에 조아리고 도열했던 광장이라는 광장, 거리라는 거리는 모두 권력 바깥의 존재들로 범람했다. 권력의 시선에서 비켜선 뒤꼍, 뒤안길까지도 인파와 함성, 촛불이 집어삼켰다. 이분법의 공간이 하나의 덩어리로 통합됐다. 100만이냐 아니냐, 1987년 6·10항쟁 때보다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는 건 호사가의 취향도, 기록을 재기 위함도 아니었다. 측정할 수 없는 거대함에 대한 표현이었다.
공간을 지배하는 정서는 분노였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8음절 구호는 ‘비선 실세 국정농단’ 사태에서 촉발된 분노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2선 퇴진’ 요구는 일주일 새 사라졌다. ‘스스로 내려오라’는 요구와 ‘끌어내리겠다’는 다짐만 선명하게 넘쳐났다. 6·10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제도에 대한 직접적 요청이었다면, 최고 권력자를 주권자의 힘으로 ‘위임 해제’하겠다는 12일의 요구는 1960년 4·19혁명의 요청과 더 깊이 닿아 있었다.
다양했다.
세종문화회관 뒷길을 행진한 청소년단체들은 “교육체제를 개혁해 학생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 중고등학생도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입학 부정에 분노했다. 동십자각 부근에 모인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성과연봉제와 퇴출제 중단”을, 농민들은 “쌀값 보장”을 주장했다. 이들은 비선 국정농단으로 상징되는 지금 정권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삶의 존엄에 미친 해악과 구조를 짚었다. 대통령 퇴진 요구는 곧 ‘생활정치’였고, 그 점에서 제도 정치적인 요구에 그쳤던 4·19나 6·10과 달랐다.
기존 정치·사회 세력의 외부로 여겨진 이들이 다양한 단위로 모여 나타난 것도 특징이었다. 지역 모임 깃발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음악 디제이들도 무대를 꾸렸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집회에 나오는 경우는 너무 흔했다. 그리고 질서정연했다. 오가기도 힘들 만큼 빽빽한 인파 속에 유모차가 함께 다닐 수 있을 만큼 안전했다. 서울 도심의 수많은 빌딩 가운데 유리창 하나 깨진 곳이 없었다. 비폭력·평화 집회는 성숙한 시민의 지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광장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100만명이 광장과 거리에 넘쳤지만 차벽 하나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만을 모으나 천만을 모으나 점성을 잃은 알갱이는 그저 모래알이다. 순수하고 준법적인 시민이라는 강박과 ‘역풍’에 대한 공포는 우리의 점성을 씻어내 버린다”고 썼다. 홍명교 월간 <오늘보다> 편집위원은 이런 강박이 “그동안 억울하게 당하고 패배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면서 쌓인 우리 안의 정치적 패배주의의 탓”이라고 지적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은 “12일 집회는 한국 역사에 기록할 만한 국민주권 행사의 날이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박근혜라는 개인이 하야하든 탄핵을 당하든 이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다”라며 “6·10항쟁이 그랬듯이 시민이 주체가 된 논의의 틀이 꾸려지지 않으면 곧장 대선 인물 경쟁 구도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원장은 “온 국민이 이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둘러싼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비상국민토론 사이트를 만들어서 대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