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제동씨는 ‘온라인 시민의회’가 논란에 휩싸이자 “온라인에서도 촛불을 들자는 제안에 오로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다는 취지로 동의했다. 누군가를 대표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신의 선의를 입증하는 데 필요한 건 ‘개인’이라는 자격이었다.
■ 2002년에도…‘개인’의 제안으로 촛불 시작 ‘11월 혁명’은 규모와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기적 같은 사태는 별안간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사실 예전에도 촛불은 등장할 때마다 매번 새로웠다. 그러면서도 유전자처럼 전승되는 특징이 있다. 2002년 처음 등장한 이래 대규모 촛불집회에 처음 불을 댕긴 주체는 한 번도 대형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었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는 그해 11월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시작돼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2008년 5월부터 석 달 동안 하루 최대 100만명에 육박하는 촛불이 광화문 일대를 수놓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는 10대 여학생들의 소박한 촛불 문화제가 도화선이 됐다. 2013년 국내외를 휩쓴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도 한 대학생의 손글씨 대자보에서 시작됐다. 물론 이들이 ‘이끌었다’고 할 수는 없다. 기존 단체와 전문가들의 꾸준한 문제제기와 집회들이 앞뒤에 있었다. 그러나 이를 ‘사건화’한 건 예외 없이 개인들의 ‘제안’이었다.
이는 2000년대 ‘새로운 개인’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는 1997년 구제금융 직후 능력주의를 앞세운 각자도생의 길로 별안간 들어섰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특히 사회에 새로 진출하는 세대에겐 소속감을 가질 만한 일자리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헬조선’ 체제의 개인은 국가를 비롯한 조직과 집단에서 배제됐다. 그와 동시에 개인 스스로 조직·집단의 하위 주체라는 자의식에서도 벗어났다. 새로운 개인들은 조직·단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해주는 것은 전혀 없으면서 앞에서 지도하려고나 드는 무능하고 진부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감정은 이미 2002년 집회에서부터 “깃발 내려!”와 “어린 소녀들의 희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반발로 표현됐다.
정치와 순수를 대립관계로 보는 태도에서는 반정치적인 경향마저 읽혔다. 개인들은 어떻게 때만 되면 스스로 촛불을 제안하고 100만 군중으로 광장에 출현할 수 있었을까.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시대에 개인들은 가장 급진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지도나 지침이 아닌 호소와 제안을 했을 때 급속도로 연쇄와 확산이 일어난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 등이 사회 모순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축적된 불만을 스스로 제기하고 직접 표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겠느냐”며 “다만 서유럽의 훌리건이나 극우정당과 달리, 한국에서는 오랜 검열기제 탓에 촛불이라는 온건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2008년 7월17일 서울 도심 촛불집회 현장에서 참가 시민 82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참가자들은 주로 티브이 뉴스(35.5%)나 인터넷카페·동호회의 권유(23.7%), 신문기사를 보고(20.4%)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친구의 권유(7.8%)나 가족의 권유(2.6%)로 나온 경우는 드물었다. 또 57.0%가 주변 사람들에게 집회 참여를 권유하거나 독려한 적이 있다고 했다. 촛불집회가 특정 조직이나 단체의 지휘보다는 소규모 그룹간 의사소통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는 뜻이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2008년 ‘촛불시위와 대중: 정보사회의 대중 형성에 관하여’란 글에서 “촛불시위 대중은 다수의 결집된 여론 공동체이자 운동체라는 점에서 공중의 결합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직이 아닌 개인간 연대에 방점을 찍은 해석이다.
■ 촛불, 순수 강박 벗고 정치화로 촛불은 매번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특히 이번에는 변화의 양상이 두드러진다. “깃발 내려!”를 요구하던 촛불 대중은 이제 자신의 깃발을 스스로 만들어 들고 나온다. 새로운 깃발에는 ‘고산병 연구회’같이 정치적 풍자가 담긴 것과 ‘장수풍뎅이 연구회’처럼 자신들만이 의미를 알 수 있거나 아예 기의가 담기지 않은 것들이 뒤섞여 있다. 촛불집회가 순수성의 강박(“깃발 내려!”)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정치를 싹틔우는 공간으로 한걸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광장의 개인들도 2002년, 2008년의 개인보다 ‘정치’에 한발 더 가까운 듯 보인다. 청년들은 또래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철 안전문에 끼여 숨지는 모습을 봤다. 대중은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할 때 국가가 사람을 살리지 않는 것을 봤다. 국가가 실은 비선의 이익집단이었다는 점도 봤다. 정치를 거부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고, 참극을 막을 수도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통령 퇴진’이라는 이슈가 과거 다른 이슈보다 정치에 훨씬 근접한 것이어서 광장에서 더이상 비정치적인 행동만 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다”며 “2008년 촛불 때만 해도 광장의 대중은 아프리카티브이 생중계를 보는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이제는 스마트폰과 에스엔에스로 자신을 직접 재현하는 주체가 됐다. 그것이 곧 정치적인 자기표현”이라고 말했다.
광장의 정치화는 기존 정치 회로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발명이다. ‘온라인 시민의회’ 논란에서 보듯 ‘탄핵 이후’ 광장의 담론은 그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새로운 정치는 기존의 정치와 비정치 사이, 조직과 개인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광장의 대중은 이미 저 이분법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안영춘 박수지 기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