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최순실씨의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는 같은 사안에 대해 지난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판결을 내놓은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와 여러 면에서 다른 판단을 내놓았다. 삼성이 최순실씨에게 제공한 ‘말’의 성격을 뇌물로 판단했고, 여러 국정농단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된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도 인정했다. 다만 ‘경영권 승계작업’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부정한 청탁’을 부인해 제3자 뇌물 혐의는 이 부회장 항소심 판단과 마찬가지로 무죄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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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뇌물로 인정해 뇌물액 증가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항소심이 뇌물로 인정한 최씨의 1인기업 코어스포츠 승마지원 용역대금 36억3484만원에 더해 말 3마리 구입비와 보험료 36억5943만원을 추가로 인정했다. 이 부회장의 1심 재판부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에 액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자동차 4대의 무상 사용 이익도 ‘뇌물’이라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은 36억원을 뇌물로 줬는데, 최씨는 약 73억원을 뇌물로 받았다는 뜻이라 대법원에서 조정이 불가피하다.
두 재판부의 판단이 다른 이유는 ‘말 소유권 이전’에 대한 엇갈린 판단 때문이다. 최씨 1심 재판부는 최씨가 “이 부회장이 브이아이피(VIP·대통령) 만났을 때 말 사준다고 했지 언제 빌려준다고 했냐”며 화를 냈던 2015년 11월15일부터 살시도와 앞으로 살 말의 소유권이 최씨에게 넘어갔다고 재판부는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화를 내면서 박상진(삼성전자 사장)에게 독일로 올 것을 요구한 것은 말의 실질적인 소유권이 피고인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려고 한 것”이라며 “박상진이 박원오(전 대한승마협회 전무)에게 ‘그까짓 말 몇 마리 사주면 된다’고 말하고 ‘기본적으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다는 것’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은 피고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이 부회장의 1심과 같게 판단했다.
반면 이 부회장의 2심 판결은 같은 상황에 대해 “화를 낸 것은 소유권 이전 요구라기보다 정유라가 타는 마필에 관한 한 적어도 삼성 명의로 등록하지 말라는 취지”라고 다르게 해석한 뒤 형식적인 말 소유권이 삼성한테 있기 때문에 뇌물이 아니라고 봤다. 이 때문에 1심에서 약 73억원이 된 승마지원 뇌물·횡령액이 절반으로 줄었고, 횡령의 법정형도 크게 낮아졌다.
이번 판결로 이 부회장의 승마지원은 뇌물이라는 법원 판단이 재차 확인됐다. 재판부는 “대통령은 기업활동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이 있다. 이 부회장에게 은밀한 방법으로 피고인 최순실을 통해 용역대금을 받았다면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이 부회장이나 박 전 대통령의 무죄 가능성도 크게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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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 업무수첩 증거능력 인정 이 부회장의 2심 재판부가 부인한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은 최씨 1심에서 다시 인정됐다. 재판부는 “대통령과 개별 면담자만 참석하여 은밀히 이루어지는 단독면담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당사자가 진술하지 않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직접 증거가 없어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 수첩 기재와 함께 대통령이 면담 내용을 불러줘 받아적었다는 안종범의 진술, 단독면담의 경위 등을 모두 종합하여 대화 내용을 증명할 수도 있다”며 간접사실에 대한 증거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단독면담은 대통령이 정부 정책을 설명하면서 협조를 구하고
이재용 등 대기업 총수들은 기업의 애로사항이나 현안을 설명하는 자리”라고 정의하고, 안종범 수첩을 바탕으로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 등에게 ‘뇌물’이나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 출연 등을 요구했다고 결론 내렸다.
앞서 이 부회장의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수첩 내용을 사실로 확인하지 않는 한 수첩을 ‘간접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로도 활용할 수 없다’는 취지로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배척했다. 이에 대해 최씨 1심 재판부는 단독면담의 직접증거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간접·정황 증거를 모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 것이다. 국정농단 관련 재판 중 유일하게 이 부회장의 2심만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어서 이 부회장의 상고심을 심리할 대법원에서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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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승계’ 부정한 청탁 부정 그러나 최씨의 1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 2심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청탁’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16억원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과 204억원의 미르·케이스포츠 재단 출연금이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먼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은 2015년 7월25일 및 2016년 2월15일 단독면담 당시 종결된 사안이므로 개별현안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1심이 인정했던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의 존재도 부정됐다.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개별현안들의 진행 자체가 승계작업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개별현안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기 어려운데 포괄현안이라는 승계작업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보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남근 변호사는 “뇌물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재단을 갑자기 설립하는 경우도 제3자 뇌물 판례를 엄격하게 적용해 처벌할 수 없다면 다들 이런 식으로 뇌물을 받으려 들 수 있다”고 비판했다. 김민경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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