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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기차 타고 베를린·평양·서울 거쳐 광주 오는 날 꿈꾼다”

등록 2018-05-16 19:45수정 2018-05-16 19:52

[짬] 재독동포 ‘한민족유럽연대’ 이종현 고문

이종현(왼쪽) 한민족유럽연대 고문과 부인 우르줄라 이나이(오른쪽)가 2년만에 조국을 방문한 지난 15일 광주 5·18자유공원을 찾았다. 사진 안관옥 기자
이종현(왼쪽) 한민족유럽연대 고문과 부인 우르줄라 이나이(오른쪽)가 2년만에 조국을 방문한 지난 15일 광주 5·18자유공원을 찾았다. 사진 안관옥 기자

유럽지역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서온 이종현(82) 한민족유럽연대 고문이 지난 15일 5·18기념재단의 초청으로 광주를 찾았다. 그는 이날 1980년 5월 계엄군의 주둔지였던 5·18자유공원을 방문해 막사 안에 당시 상황을 재현해놓은 특별전을 돌아봤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구타나 시민들의 처참한 주검을 마주하는 그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잔뜩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소개한 공간에 들어가면서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용감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사진을 가리키며 독일인 부인 우르줄라 이나이(76)에게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인”이라고 소개했다. 부인은 “그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세운 광주 사람들이 존경스럽다”고 맞장구를 쳤다. 다음 전시인 ‘평화의 방’에선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지난 4월27일 판문점 남북회담 사진 앞에서는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오가는 장면을 큰 걸음으로 흉내내기도 했다.

1965년 장성탄광 실습 거쳐 독일로
‘파독 광원·간호사 권리 찾기’ 비롯
민주화운동 앞장…‘80년 광주’ 경악
81년부터 오월민중제 열어 넋 위로

2016년 입국불허로 공항서 되돌아가
“인터넷 유포 ‘5·18폄훼’ 바로잡아야”

이종현 한민족유럽연대 고문이 지난 15일 광주 5·18자유공원 안 특별전에 전시된 ‘80년 5월’ 사진을 보면서 81년부터 독일에서 오월민중제를 열고 있는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안관옥 기자
이종현 한민족유럽연대 고문이 지난 15일 광주 5·18자유공원 안 특별전에 전시된 ‘80년 5월’ 사진을 보면서 81년부터 독일에서 오월민중제를 열고 있는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안관옥 기자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답니다. 베를린에서 기차 타고 평양을 거쳐 서울 찍고 광주까지 오는 거지요. 저처럼 나이 든 국외동포 상당수가 이런 꿈을 꾸지요.”

그가 이처럼 자유왕래를 목말라하는 것은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5월 입국을 거부당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450㎞ 떨어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에 사는 부부는 그때 기차와 비행기로 70시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안당국은 “국가 이익과 공공안전을 해할 우려가 있는 자”라는 이유로 입국을 불허하고, 공항 체류 1박2일 만에 부부를 돌려보냈다. 그는 이미 형님이 있는 북한에 90년부터 세차례, 고향이 있는 한국에 73년부터 세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 때인 2010년 12월에도 문제없이 입국했던 터여서 분노가 더 컸다.

독일로 돌아간 부부는 “국외동포를 분단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 국외동포의 자유로운 고국 방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손팻말을 내걸고 항의시위를 했다. 안타깝게도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그는 “아마도 박근혜 정권 퇴진, 일본군 ‘위안부’ 합의 철회, 세월호 진상 규명 등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5·18기념식에 참석하려 한다니 ‘미운털’이 박혔었나 보다”라며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광주를 찾은 그는 20일까지 아시아포럼, 5·18기념식, 인권상 시상식 등 분주한 일정이다. 그는 “광주는 전체 민중이 합치면 그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줬다. 5·18은 시민저항운동의 거울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퍼져 사는 한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터넷의 ‘5·18 왜곡’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국외동포 2·3세는 조국의 정보를 대부분 인터넷에서 얻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심하게 오염돼 진실을 알기 어렵다. 인터넷에 숨어 5·18을 악랄하게 깎아내리는 행동을 막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뒤 귀국했고 20대 후반인 65년 장성탄광에서 실습을 한 뒤 광원으로 독일에 갔다. 68년까지 3년 동안 뒤스부르크에서 일한 뒤 69년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회사에 들어갔다. 광원 시절 <기사도 정신>이란 책을 구하려던 인연으로 서점을 운영하던 우르줄라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결혼하면서 “나는 50% 독일인이 될 테니, 그대는 50% 한국인이 되라”는 약속을 했고, 지금도 이를 지켜오고 있다.

독일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그지만 억압받는 조국의 현실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60년대 말 파독 광원·간호사들의 권리 찾기부터 74년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거쳐 2000년 6·15 공동선언 실천까지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앞장섰다. 특히 80년 5·18이 그에게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그는 그해 5월22일 독일 방송의 뉴스에서 계엄군의 학살 사실을 알고 경악해 곧바로 5월30일 베를린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항의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그는 81년 유럽에서 ‘광주’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오월민중제’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껏 오월제를 이어왔다. 그는 “부모형제가 사는 조국에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났는데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오월민중제는 해마다 2박3일 동안 영상 상영, 추모제, 시국 강연, 행사 평가, 내년 계획 등으로 진행한다. 해마다 150여명 안팎이 본 베를린, 빌레펠트 등에 모여 그날을 기렸다. 올해는 오는 18~20일 베를린에서 열리고, 사상 처음으로 주독일 한국대사도 참여할 예정이다.

그는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재유럽노동자연맹, 6·15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 유럽지부, 한민족유럽연대 등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윤이상, 이응로 선생도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해 교유했다. 이런 활동을 50여년 지속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유럽지역 민족민주운동의 산증인이 됐다.

그는 “90년 평양에서 범민족대회가 성사됐을 때, 99년 김대중 선생이 구명운동에 대한 감사 편지를 보내왔을 때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이제 여생을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 통일과 번영에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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