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손잡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뒷조사하는 비밀공작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이현동 전 국세청장이 지난 2월1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북공작금을 받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의혹 관련 뒷조사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현동 전 국세청장에게 지난 8일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은 “동의하기 어려운 결론”이라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전 청장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과 공모해 2010년 5월~2012년 3월 김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추적 명목(‘데이비드슨 사업’)으로 대북공작에 써야 할 자금 5억3500만원과 4만7000천달러를 지출한 혐의(국고손실)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원 전 원장에게 ‘해외정보원에게 지급할 돈이 없다’며 활동비를 요구해, 2011년 9월 국세청 접견실로 찾아온 김승연 당시 국정원 대북공작국장으로부터 1억2천만원을 뇌물로 받은 혐의도 적용됐다.
이 사건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조의연) 선고를 보면, “비자금 첩보의 대북 관련성”을 인정해 “비자금 추적은 국정원 직무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고 판단한 부분이 눈에 띈다. 재판부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핀셋 사찰’에 불법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정원 정보활동 대상에서 원천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특히 국가정보원법이 허용하는 국정원의 협조 요청을 ‘일방적’으로 받은 이 전 청장으로서는 불법행위의 고의는 없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반면 검찰은 “국정원 업무와 무관한 정치적 의도에서 공작이 실행됐다는 것을 국세청도 충분히 인식한 뒤 공작에 가담했다”고 반박했다. 실제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보면, 이 전 청장은 ‘국세청의 보복 조사’ 논란 등 디제이 비자금 추적의 민감성과 정치적 폭발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이 진술과 기록으로 확인된다. 게다가 국세청 국제조세관리관이 비자금 정보 수집 근거로 삼은 것은 인터넷에 유포된 ‘풍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 비자금이 (아들) 김홍업씨 측근의 미국 부동산 구매자금에 동원됐다’는 게 그 내용인데, 재판부 역시 “북한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 아니다”라고 정리했다. 재판부는 또 원 전 원장이 구체적 근거 없이 김 전 대통령을 ‘지목’한 뒤 비자금 추적을 요구한 점도 ‘정치적 의도’를 엿볼 만한 대목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국세청이 국정원 요구가 불법적이라고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반면 재판부는 “처음부터 (국정원에)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느꼈다”는 국세청 국제조세관리관의 진술도 ‘내심의 추측’일 뿐이라고 봤다. 최종흡 국정원 3차장은 애초 ‘비자금 추적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검찰에 진술했지만, 이후 ‘정치적 의도가 아닌 대북 관련성을 추적한 것’이라고 말을 뒤집었다. 국정원 쪽은 ‘미국에 디제이 비자금 있다는 첩보→비자금 일부가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첩보→이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 디제이 비자금이 있는지 조사’해야 했다는 ‘도돌이표’ 주장을 폈는데, 재판부를 이런 진술 번복과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국정원도 ‘비자금의 대북 관련성’을 의심할 정도였으니 국세청 역시 ‘정치적 의도’나 불법성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국세청의 가담 정도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판단도 갈렸다. 재판부는 국세청을 국정원에 대한 ‘단순 협조자’로 간주한 반면, 검찰은 “국세청이 스스로 액수를 정하는 등 불법 공작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고 반박했다. 애초 국세청이 해외정보원에게 정보 수집 대가로 3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뒤 국정원에 통보했고, 2년 가까이 이런 소통 과정을 지속한 것은 재판부도 사실관계로 인정한 내용이다. 이 전 청장 역시 자금 전달 과정을 속속들이 보고받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세청은 국정원 자금의 조성 경위 등을 알지 못했고, 국정원과 협의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 전 청장은 국세청 직원을 통해 국정원에 해외정보원을 소개해 주거나, 해외정보원의 자금 요구를 국정원에 전달하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뒷조사 의혹 관련 첫 법원 판단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같은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과 최 전 차장 등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결과에도 관심이 모인다. 특히 재판부가 “첩보의 대북 관련성”을 무죄 근거로 들면서, 자칫 정보기관의 무제한적 사찰을 정당화하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앞서 법원이 원 전 원장 등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댓글공작은) 북한의 공작에 대응하기 위한 정당한 업무”라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대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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