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와 기독교계의 연대를 이끌어낸 최린과 이승훈(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1919년 2월24일 경성/오승훈 기자】
천도교와 기독교 측 종교 지도자들이 오는 3월1일에 ‘독립선언식’ 방식의 독립운동을 거행하기로 24일 최종 합의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종교세력인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손을 맞잡으면서 명망가들의 불참으로 한때 좌초 위기에 놓였던 ‘거사’의 불씨가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막판 연대에는 천도교 측 최린(41)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과 기독교 측 이승훈(55) 장로의 역할이 주효하였다.
최 교장과 이 장로, 함태영(47) 전 대한제국 판사 등 주요 인사들은 24일 밤 최 교장 자택에서 비밀회동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방식의 거사를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일로 정한 이유는 고종의 장례식인 3일을 피하되 국장을 보러 사전에 상경한 인파를 고려한 데 따른 것이지만, 3일에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하였다. 애초 2일도 거론되었으나 일요일인지라 기독교계가 난색을 보여 1일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날 최 교장은 밤늦게 불교계 대표인 만해 한용운 스님과 비밀회동을 하고 동참 의사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기, 모든 사회단체는 해산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정치결사의 자유는 없었다. 그나마 제한적으로 허용된 건 서양선교사들과 민족감정을 의식한 종교단체였다. 거사 모의가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배경이었다.
거국적 독립운동을 먼저 제안한 곳은 천도교였다. 천도교 창건자인 손병희(58)와 그의 측근인 권동진(58), 오세창(55) 그리고 경술년(1910) 국망 직후 천도교에 입교한 최린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이 핵심이었다. 그들은 올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는데 연대를 위한 연락 실무는 발 빠른 최 교장이 맡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원칙으로 ‘대중화, 비폭력, 일원화’ 세가지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물리력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대중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내란죄 적용을 피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천도교가 염두에 둔 가장 중요한 연대세력은 기독교였다. 최린이 평북 정주에 거주하는 이승훈과 접촉을 시도한 이유였다. 이승훈은 비밀결사 신민회 출신으로 신해년(1911)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옥고를 치렀던 기독교 장로교의 핵심인물이다. 지난 11일에 상경한 이승훈은 최린이 보낸 송진우(32) 중앙학교 교장을 만났는데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동참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이승훈은 무엇보다 내부 ‘단일화’ 작업에 나섰다. 중앙집권적 단일조직인 천도교와 달리 기독교계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어 있었던 탓에 두 교파의 단결이 종교 간 연합의 선결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평북 선천에서 장로교 지도자인 양전백(50)·유여대·김병조·이명룡(46) 등을 만나 동참을 끌어냈다. 평양에서는 장로교의 길선주(50) 목사와 함께 감리교의 신홍식(47) 목사를 만나 동의를 구하였다.
애초 천도교와의 연합에 소극적이었던 함태영 장로. <한겨레> 자료사진
천도교와의 연대가 결렬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17일에 다시 상경한 이 장로는 최남선을 대신해 나타난 송진우가 계속 사무적 태도를 보이자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20일, 평양에서 온 신홍식과 서울의 감리교 지도자인 박희도(30)·오화영(39)·정춘수(46)·오기선(42) 등과 만나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장로교에서는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27), 오상근, 현순(39) 등이 모임에 함께하였다.
꺼질 것만 같았던 ‘천도교·기독교 연합’의 불씨는 21일에 이승훈과 최린이 만나면서 되살아났다. 최린은 이날 이승훈에게 기독교만의 독자적 추진을 중단하고 공동행동에 나설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독립선언보다 좀 더 온건한 독립청원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자고 맞섰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이 민족자결주의라는 외부적 정세의 영향하에서 제기된 것인 만큼 민족자결의 의사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에 청원하는 것은 단지 당사자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니 민족자결의 의사를 충분히 표시할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기독교 측은 일단 장로교 및 감리교 지도자들과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섰다.
연대의 물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승훈이 이날 기독교 민족대표들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가족 생계자금으로 5천원(현재가치 약 4억원)을 요구했는데 최린의 보고를 받은 손병희가 곧바로 자금을 제공했다. 천도교와의 공동행동을 주저했던 기독교 측 인사들이 더는 연대를 거부할 명분이 사라지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타결로 기울었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맡되 배포는 두 종교계가 함께 하기로 하였다. 지방의 천도교회와 기독교회에서도 같은날 독립선언식을 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천도교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고 기독교 측은 주요 열강들에 선언서를 번역해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
합의를 끌어낸 최 교장은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분리해 조선인에게 독립을 줘 동양평화를 실현코자 한다”며 “그것은 첫째 조선민족의 생존권 확장, 둘째 일본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잘못을 뉘우쳐 깨닫게 하고 셋째 세계평화를 부르짖는 여러 나라의 동정을 얻기 위함”이라고 거사 목적을 강조했다. 기독교계와의 합의가 완료됨에 따라 천도교 측은 이날 독립선언에 서명할 민족대표 인선 작업에 착수했다. 빠르면 25일에 확정될 명단에는 손병희 선생과 최린·권동진·오세창 등 15명 정도가 선정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김정인,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책과함께·2019)
김정인, ‘1910~25년간 천도교 세력의 동향과 민족운동’(한국사론·1994)
김정인,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역사교육·2018)
조규태, ‘최린의 천도교활동과 민족운동’(한성사학·2011)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한울·1998)
조동걸,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2007)
이덕주, ‘3·1운동과 기독교’(한국기독교와 역사·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