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3월5일 경성/엄지원 기자】
5일 아침 8시 무렵, 남대문 역전은 쇄도하는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고종황제의 국장 절차가 완료되어 귀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거사’ 소식을 듣고 모여든 젊은 학생도 다수였다. 1일 만세운동이 전개된 뒤 일요일과 인산일을 지나며 경성 일대가 비교적 조용한 듯하였지만 이는 태풍 전야였을 뿐이다. 왁자한 인파 속에서 이화학당 2학년 노예달(19)씨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듯 치맛자락을 손에 꾹 쥐고 있었다. 그는 이날 아침 흰 저고리와 흰 치마를 상하로 차려입고 짚신을 꺼내어 신었다. 평소엔 조선 복식에도 구두를 신지만 달음박질칠 때는 구두보다 짚신이 편하다는 것을 조선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립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오. 그런데 조선은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본과 병합되어 타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소. 지금 독립할 수 있다면 이는 하늘이 정해준 이치에 맞는 것이오.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이라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기쁜 일이므로, 나도 여자이지만 그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소.” 노씨는 여학생으로서 운동에 나선 이유에 대해 본지에 이같이 말하였다. 그는 1일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도 학교에서 외출을 금지하자 기숙사 안에서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다시 기회가 생기기만 한다면 반드시 뛰어나가 ‘만세’를 부르리라. 그는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남대문 역전 가득 메운 오천 군중
「조선독립」 대서한 기 들고
김원벽·강기덕 등장하자 기다렸단 듯이 “만세” 외쳐
이날 ‘제2회 독립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전달되었다. 풍설로 나도는 거사 장소가 제각각인 것을 알고 하숙방 동기인 사립국어보급학교 학생 채순병(16), 중동야학교 학생 김종현(19),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최강윤(19) 제씨는 직접 통고문 제작에 나섰다. ‘5일 오전 8시30분 남대문 역전에 집합하여 제2회 독립운동을 개최하니 태극기를 가지고 오시오.’ 4일 밤 경성부 안국동 93번지 하숙방에 모인 세 학생은 김종현씨가 비상금을 털어 사온 탄산지(복사에 쓰이는 종이) 200매를 400매로 쪼개어 철필로 이같은 지령을 눌러썼다. 이들은 이 종이쪽지를 들고 나가 하숙집 인근 수송동·송현동·소격동·중학동 일대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만세’, 그 목마른 외침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5일 아침 모여든 군중은 5천여명(조선군사령부 추산 1만명)을 이뤘다. 우왕좌왕하는 인파 가운데서 홀연 누군가 목청을 높여 연설을 시작하였다. 국장 참석을 마치고 고향인 전남 광주로 돌아가던 예수교(기독교) 전도사 최흥종(39)씨였다. 최씨는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한 연설을 하기 위해 기어코 서울에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허나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말은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번 거사의 수뇌부인 김원벽(25·연희전문학교), 강기덕(33·보성법률상업학교)씨가 ‘조선독립’이라고 대서한 기를 든 채 차례로 인력거를 타고 영웅처럼 등장하였던 까닭이다. 약속한 시각에 조금 늦은 탓으로 인력거를 탄 것이 그들을 영락없는 지도자로 보이게끔 하였다. 그들의 등장에 누구랄 것도 없이 시위 군중은 “만세! 만세!” 외쳐대었다.
남대문 역전에 모인 시위대는 김·강 양씨를 선두로 남대문을 향해 행진하였다. ‘독립운동자의 표시를 명료하게 하기 위한’ 붉은 띠를 팔뚝에 둘러맨 학생들은 지도자들이 만세를 선창하면 그에 따라 만세를 고창하였다. 학생들 중 일부는 선전물을 군중에게 전달하기에 바빴다.
무엇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것인가.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시위대 중 한 명으로 원산 구세병원 간호사인 탁마리아(탁명숙·25)씨의 기대는 솔직하다. “조선인이 독립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같이 떠들면 일본 정부나 세계 각국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도 조선을 독립시켜 준다고 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도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다.”
일제, 초반부터 강경진압 ‘전국 학교에 휴교령’
이미 1일 만세운동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일경은 이번에는 초반부터 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고 가열차게 행진하였다. 여학생들은 대오에서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남학생들과 동등하게 나섰다. “전열이 매를 맞고 검거되면 다음이 또 열을 짓고 돌진하였다”고 총독부는 설명하였다. 100여명이 검거되어 경찰에 붙잡혀 갔으며 여학생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헌병대에 붙들린 홍순복(20)씨는 “나는 귀갓길에 조선호텔 앞에서 여학생이 체포당해 가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 그곳에서 만세를 불렀다가 체포당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주동세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5일을 전후해 전국의 학교들은 대부분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휴교하자 학생들은 봇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학
생들의 보따리 속, 가슴속에는 ‘선언서’가 숨겨져 있었고, 이들은 고향에서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는 전령이 된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17)도 그런 숱한 학생 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참고문헌
박찬승,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2018)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주년 총서>(휴머니스트·2019)
노예달·탁마리아 등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