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각지의 폭동'이란 제목의 <아사히신문>(도쿄판) 1919년 3월7일 지면. 연합뉴스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지난 1일 전국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이 이를 일부 종교지도자의 음모 또는 외국인 선교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하고 나섰다. 조선인을 ‘폭도’ 또는 ‘범인’으로 규정하고, ‘폭민의 경찰서 습격’ ‘헌병 참살’ ‘순사 학살’ ‘내지인 상점에서 폭행’ 등 일본인의 피해만을 과대선전하여 만세시위를 비난 공격하는 데 급급한 것이다.
만세시위를 일본에 처음 보도한 언론은 3일자 <동경아사히신문>과 <동경마이니치신문>이었다. 이어 5일에는 <중외산업신보> 등이 서울과 지방의 상황을 앞다퉈 전하였다. 이 중 ‘불온격문배포’라는 제목의 <동경아사히신문> 첫 기사는 다음과 같다.
“국장을 앞두고 경성은 각지로부터 올라온 자가 많아 매우 들끓었다. 1일 아침 남대문역에서 선인(鮮人)이 조선어로 쓴 격문을 붙였다. 또 조선인으로서 중요한 자에게도 같은 격문을 배포하였다. 이에 경무총감부는 활동을 개시하였다. 덕수궁 장례식에 참석중이던 고다마 경무총감은 오전 11시 반, 급거 경무총감부로 돌아가 헌병대 경찰서장을 집합시켰다.”
태화관의 민족대표들과, 파고다공원의 학생층을 중심으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대한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경무총감부의 활동만을 일본에 알리는 기사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의 발발로 관헌측은 물론 언론계도 사건의 추이에 대응하기 어려웠겠으나, 작년 쌀폭동 당시 일본 민중의 입장을 대변해 정론지로 각광을 받은 <동경아사히신문>의 명성이 무색한 지경이다.
더욱이 일본인들에게 만세시위에 대한 편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 입은 피해를 과도하게 부각시킨 반면, 조선인 사상자에 대해선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조선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일제의 어용언론답다. 이쯤 되면 언론이 아니라 언롱(言弄)이라 부를 만하다. 권력과 한 몸이 되어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 모리배들은 지금 이 땅에도 차고 넘친다. 【마포 오첨지】
△참고문헌
이규수, ‘3·1운동에 대한 일본언론의 인식’(역사비평·2003)